고정 헤더 영역
상세 컨텐츠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생각 근육 키우기와 ‘총명 불여둔필(聰明 不如鈍筆)’: 쓰기의 힘
한자 성어에 ‘총명 불여둔필(聰明 不如鈍筆)’이 있다.
직역하자면 ‘영리하고 재주가 있어도 굼뜨고 서툰 글씨만 못하다’라는 뜻인데, 기억력이 좋은 이도 글로 적어두는 것만 못함을 뜻한다. ‘총총명 불여둔필(聰聰明 不如鈍筆)’로 강조하기도 한다. 제아무리 기억력이 좋고 영리한 이도 그때그때 글자로 담아두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이걸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필이 총기를 이긴다)’으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독일 속담에 ‘기억력이 좋은 머리보다도 끝이 무딘 연필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한자 성어의 의미와 정확히 똑같다.
이 말은 주로 ‘아무리 똑똑하고 기억이 좋더라도 못난 글씨나마 적어 놓는 것을 당하지 못한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하여도 그때그때 적어 두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즉 적어두기(메모하기)의 중요성을 뜻하는 말로만 여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놓치기 쉬운 굵은 심지 하나가 더 들어 있다. 바로 생각하기 버릇이 주는[길러내는] 큰 힘이다. 무엇이건 글자로 갈무리하려면 잠깐 멈춰야 한다. 빠르게 변전하는 의식의 흐름을 멈추고 자신이 착목(着目)한[떠올린] 것에 잠깐이라도 주목해야만 뭔가가 응결된다. 바로 그때 생각하기가 작동한다. 생각의 근육이 움직인다. 보고 듣는 시청각 세계를 벗어나 내부 세계로 침잠한다, 잠깐이라도. 그러고 나면 그것들이 비로소 글자로 요약된다. 메모 형태로든 뭐로든.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소득이 한 가지 더 생긴다. 즉 순간적인 생각들이 가다듬어진다. 앞뒤를 맞추게 되고 논리력이 보강되면서 조야(粗野. 거칠고 막됨)해서 조잡(粗雜. 거칠고 잡스러워 품위가 없음)하기도 했던 것들이 매끄러워진다. 대충 급조했던 막치(되는대로 마구 만들어 질이 낮은 물건)들이 꼴과 깔(물건의 빛깔이나 맵시)을 갖추게 된다. 때깔(눈에 선뜻 드러나 비치는 맵시나 빛깔) 나는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된다.
크나 적으나 글자로 적기. 글로 표현하기. 이것들은 생각 근육을 키운다. 요즘 휴대폰에 코를 박고서 그림들만 휙휙 넘기는 사이에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되는 건 아이들이나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다. 예외가 아닌 어른들도 부지기수다.
남들이 보든 말든, 관심하든 말든, 글자로 표현하려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만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고, 휩쓸리기와 베끼기의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떼지어 지르는 소음에는 의미 있는 소리들이 없다. 있어도 휩쓸려 떠들면 들리지 않는다. 그저 소음 생산자의 하나로 편입될 뿐이다. 그리고 남들 소리에 이끌려 살면, 타인들의 주목에 목 매달고 살아내다 보면, 마지막까지도 베끼기로 끝난다. 남들의 이목부터 떠올리면서 그럴 듯한 장례식 따위를 미리 조형하는 식으로.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웃기는 짓인가 하면 비명횡사, 자연재해사로 시신을 못 찾는 일 따위도 비일비재하고 그것이 그의 경우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생각 근육이 허약하거나, 생각하기를 귀찮아 하는 게 버릇으로 굳어진 이들은 그 안이 허술하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찬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한숨은 통제권을 벗어나 제멋대로 나온다. 불면증은 덤이고 잡생각은 우수리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생각하기다. 삶의 틈새에서 잠깐 멈춰 서서 생각을 조금 해보면 그것이 곧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시원하게 잘라낸 알렉산더의 단칼이 된다.
사진: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칼로 잘라내 해결하는 알렉산더. BC 800년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우스는 자신의 마차를 제우스 신전에 봉안한 뒤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둔다. 그리고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왕이 되리라는 신탁을 남긴다. 이 매듭을 풀기 위해 수많은 영웅들이 도전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수백 년 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제우스 신전을 찾아가 단칼질로 매듭을 잘라 버렸고 이후 실제로 아시아를 정복하게 된다.
무엇이든 글자로 갈무리하려는 이들에겐 선물이 주어진다. 생각 근육이 길러진다. 그런 이들은 장삼이사 갑남을녀의 재해급 홍수 속에서도, 지진급 소음 속에서도, 헤엄쳐 나온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평정심 덕택에.
내 안의 평온과 평안은 평정심의 온상에서 싹이 터서 평정심의 온실에서 자라난다. 기분 따위에 쉬 흔들리지 않고 생각 근육을 키우면서 의연히 마음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돌아가는 축복의 하나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23 Sep. 2023)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