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의 한마디 514] ‘다음’이 확실하면 희망을 넘어 보증수표가 된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있다. 몸과 맘이 건강해야 한다

유치원으로 간 꼰대의 돌직구

by 지구촌사람 2023. 8. 28. 04:51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나의 한마디 514] ‘다음’이 확실하면 희망을 넘어 보증수표가 된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있다. 몸과 맘이 건강해야 한다

 

약속의 대명사, ‘다음에’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오자, 꼭”

“다음엔 이것보다 더 좋은 걸로 해줄게, 반드시”

“다음에 우리 또 보세. 내가 쏠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약속들을 적지 않게 하고, 그럴 때마다 손쉽게 끌려나오는 말이 ‘다음’이다. 간간이 ‘나중’이라는 말도 쓰이지만, 빈도나 효용의 면에서 ‘다음’보다는 인기가 떨어진다.

 

나 역시 이 ‘다음’이란 말을 꽤 많이 써 왔다. ‘다음에 우리가 서울에 있고 첫눈이 오면 여기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했고, 그 뒤로 7~8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서울에 있게 되었을 때 경기도 광릉에 첫눈이 내리기에 기를 쓰고 그 약속 장소에 나간 적도 있다. 결과는 바람을 맞았는데 몇 년 뒤 그 이유를 듣고 앞뒤를 맞춰보니 그녀가 살고 있던 00동에 첫눈이 내린 날은 다른 날이었다.

 

우리 딸내미가 어린 시절 제주에 갔을 때 그곳을 엄청 좋아했다. 그래서 다음 생일 때도 또 오자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10여 년 동안 꼬박꼬박 지켰다. 한 해의 1/3 가량을 해외 출장이 잡아먹고 있을 때도 주말은 최대한 가족과 함께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를 쓰고 출장 일정을 미리 내가 조정하곤 했다. 해외 부문을 맡고 있던 내게 그럴 힘이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런 나도 무책임한 ‘다음’을 남발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게 그냥 의례적으로 뱉은 말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의 본심과는 달리 기억력이 따라주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어쩌다 가끔 생각이 나서 돌아보면 그랬다.

 

다음’이 확실하면 희망을 넘어 보증수표가 된다

 

이와 달리 ‘확실한 다음’도 있다. 99.9% 이행/실천이 확실한 다음들이다. 매주 0요일로 정해진 모임이나 봉사활동에서부터, 상대방이 보여주는 실행 의지와 행동 습관으로 미루어 그 실천이 확실하게 담보된 경우들이다.

 

그런 ‘다음’의 내용들은 대체로 좋은 것들이다. 그래서 ‘다음’은 기본적으로 희망적이다. 내일을 향한 꿈 그리기로 번지면 앞날이 환해지는 등불이 되기도 한다. 그런 희망의 ‘다음’이 확실해지면, 즉 '확실한 다음'은, 희망을 넘어 아예 보증수표가 된다.

 

보증수표(保證手票)는 지급이 보증된다는 뜻으로, ‘자기앞수표’를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은행에 제시하여 지급 보증을 받은 수표라는 뜻도 있다. 이때는 지급보증수표(支給保證手票)의 준말 격으로 지급이 보증된다는 게 주된 의미다. 즉 현찰화가 보증돼 있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보증수표는 흥행/성공/승리 따위를 보증하는 요소/물건의 비유어로도 쓰이게 되었다. 보증수표의 상대어는 공수표(空手票) 내지는 부도수표인데, 비유어로는 ‘실행이 없는 약속’을 뜻한다.

 

‘확실한 다음’도 실행 여부는 맘과 몸의 확실한 존재가 관건이다

 

내 친구 중의 하나에 과묵하면서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있었다. 유명 농대를 나와서 처음에는 농산물을 다루더니 나중에는 쥬스와 생수 분야에서 강소기업이 되었다. 그만치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가 사업을 접고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겠다면서 700억 원대의 거금을 받고 회사를 모 그룹 회사로 넘겼다.

 

그러면서 그가 한 말, ‘나도 이젠 내 시간이 생겼으니, 자네들과 함께 어디 근교로 나가 1박2일쯤 그냥 편히 놀고 먹고 싶군. 내가 쏠게’. 우리들 모두는 그 말을 믿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의 말은 그동안 내내 보증수표였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저 세상으로 갔다. 갑자기 드러난 췌장암으로. 그 전까지는 안색이 좀 어두워서 친구들이 걱정하자 담낭 쪽에 아주 작은 문제가 있다고만 했던 그였다.

 

여인 하나가 있었는데 그녀의 별명은 산부처이자 산보살이었다. 그만치 아주 착하고 어질었다. 무슨 부탁을 해도 모두 오케이로 답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걸 캐물으면 그때마다 그녀의 답은 ‘아차. 내가 그걸 깜빡했네그려’였다. 그리고 그건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녀는 하도 많은 부탁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머릿속에만 담아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의 선의(善意)는 그녀의 두뇌 용량을 늘 초과했다.

 

그녀의 약속 불이행은 기억력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중년 시절 이혼을 겪으며 그녀를 괴롭혔던 좋지 않은 기억들 앞에서 그걸 무조건 망각하는 것으로 몽땅 지워내려 했던 그녀의 사고 습관 탓에도 있었다. 즉 그녀의 과거를 향한 망각력은 미래를 향한 기억력보다 훨씬 더 막강하고 위력적이어서, 앞날을 담당하는 기억들의 생존력은 단명이거나 허술했다.

 

내 친구와 이 여인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두 사람 모두 그 약속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한 다음’의 주인공들이었지만, 둘 다 확실한 실체적 존재에는 이르지 못했다. 내 친구는 실체적으로 몸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인의 경우는 맘 속에 확실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둘 다 선의의 의도는 확실했지만, 약속의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둘은 결과적으로는 부도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되었다.

 

‘확실한 다음’도 실행 여부는 맘과 몸의 확실한 존재, 실체적 존재가 관건이다. 몸이 건강해야 약속을 실천할 수 있고, 맘속에 확실하게 실물로 각인된 기억이 있어야 약속을 잊지 않고 챙기게 된다. 한마디로 몸과 맘이 건강해야 ‘확실한 다음’이 되고, 희망이 실현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선물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 맘과 몸이 건강해야 하는 이유. 그중 하나는 약속의 이행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한 선의의 약속은 희망이기도 한데 그것이 보증수표가 되기 위해서는, 공수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맘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도 우리는 건강해야 한다. 안팎의 삶 모두에서. 그렇지 않을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25 Aug. 2023)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