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하다’와 ‘허접하다’는 요즘의 언중들 사이에서 예사로 흔히 쓰이는 말이다. 가끔 ‘거시기스럽다’와 ‘허접스럽다’도 보인다.
하지만, ‘거시기하다/거시기스럽다’는 표준어 관리기관인 국립국어원이 관리하는 사전에 없는 비표준어이고, ‘허접하다/허접스럽다’는 표준어지만 남들 몰래 의붓자식을 호적에 올리듯이 2015년 이후에 슬쩍 끼워 넣은 말이다. 비겁하게도! 다시 말해서 둘 다 문제적인 말이다.
‘거시기하다’도 인정해야 한다. 조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거시기하다’가 사전에 없는 이유는 현재 ‘거시기’가 대명사와 감탄사로만 정해져 있어서다. 즉, 대명사로는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감탄사로는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로 규정돼 있다. 현재 ‘거시기하다’를 사전의 표제어[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는 중대형 사전으로는 고려대 한국어사전(이하 ‘고려대사전’으로 약칭)뿐이다. 고려대사전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내용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일종의 야당성(?) 사전이다.
‘거시기하다’는 용언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는 ‘거시기’가 대명사이므로 대명사에 ‘하다’를 붙여 용언화할 수 없다는 태도가 완고하다. 하지만 이는 편협한 옹고집에 가깝다. 대명사에 뿌리를 두고 변전된 유사 형태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렇다/저렇다/그렇다’를 보자. 이것들의 본말은 각각 ‘이러하다/저러하다/그러하다’이고 그 뿌리는 각각 대명사인 ‘이(것)/저(것)/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하다, 저(것)+하다, 그(것)+하다’에서 ‘이러하다/저러하다/그러하다’가 나왔고 그 준말들이 형용사인 ‘이렇다/저렇다/그렇다’이다(참고: ‘아무렇다’의 본말 ‘아무러하다’에 쓰인 ‘아무’도 대명사다). 그래서 뜻풀이도 모두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이[저/그]와 같다’다. 즉 가장 근본적인 밑말들은 대명사인 ‘이/저/그’다. 다시 말하면, 중간의 변전은 있었을지라도 대명사에 ‘하다’를 붙인 꼴의 말들이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언중들이 그걸 이끌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거시기하다’는 성립할 수 있다. 현재의 표준어 규정에 의하면 어근에 ‘하다’를 붙이면 용언이 된다. 그 뿌리가 수상한(?) ‘거시기’를 어근으로 인정하면 된다. 아래에서 보듯 우리말의 어근은 두루뭉술하게 묶을 때 아주 편리한 개념이니까.
‘그럴듯하다/그럴싸하다/알은체하다/알은척하다; 마지못하다/아무러하다/떠들썩하다’를 보자.
‘그럴듯하다/그럴싸하다/알은체하다/알은척하다’를 형태소로 분석하면 ‘그럴+듯+하다, 그럴+싸+하다, 알은+체+하다, 알은+척+하다’가 된다. ‘마지못하다/아무러하다/떠들썩하다’는 ‘마지+못+하다, 아무+러+하다, 떠들+썩+하다’로 분석된다. 하지만, 용언화(복합어 인정) 과정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형태소적 요소들(예: ‘그럴+듯+하다’는 3개의 형태소 구조)을 하나의 어근 (‘그럴듯’)으로 그냥 통합하여 ‘어근(’그럴듯‘)+하다’ 꼴로만 단순화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다’가 붙은 한 낱말의 복합어 꼴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앞의 것들을 무조건 어근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낱말 검색을 해보면 ‘~의 어근’이라고만 편리하게 제시된 것들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저 위에 짧게 언급한 ‘아무렇다=아무러하다’의 경우도 ‘아무러’에 대해서는 그 조어 구조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이(복잡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전거도 없기 때문에) 그냥 ‘아무러하다’의 어근으로만 얼버무리면 끝이다. ‘나지막하다’에서와 같은 ‘~막하다’, ‘께름칙하다/께름직하다’와 같은 ‘~칙/직하다’의 꼴에서도 ‘나지막/께름칙/께름직’을 그냥 어근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것도 그 편리성 때문이다. (그럴 경우 ‘막/칙/직’이 지닌 조어 기능이 무시되고 만다. 이 말들을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말들이 무수함에도.)
한편 감탄사로 쓰일 경우에도, 감탄사에는 ‘하다’를 붙여 용언을 만드는 게 어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관점도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태도다. 일례로 ‘오냐오냐하다’가 있다. 이때 밑말로 쓰인 ‘오냐’는 태도 감탄사다. ‘글쎄. 잘 모르겠어’에 쓰인 ‘글쎄’처럼. 물론 감탄사+하다 꼴을 일률적으로 인정하면 조어법상의 일부 혼란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고, 언어는 생물이다. 그것도 언중에 의해서 생산되고 성장하는. 사전이 그 과정 전체를 봉쇄하거나 억압해선 안 된다.
참. ‘거시기하다’를 표준어로 인정한 고려대 사전도 그 태도가 매우 어정쩡하다. 현재 그 뜻풀이를 형용사(적당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상태나 속성을 언급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와 자동사(적당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행위를 언급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밑줄은 필자]로 하고 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의 감탄사 처리 태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용언의 뜻풀이는 ‘웃다(기쁘거나 만족스럽거나 우스울 때 얼굴을 활짝 펴거나 소리를 내다/얼굴에 환한 표정을 짓거나 소리를 내어 어떤 종류의 웃음을 나타내다/같잖게 여기어 경멸하다)’나 ‘슬프다(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와 같이 거의 모두 ‘~다’로 끝나는데, 이 풀이는 감탄사의 뜻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허접하다’의 표준어 처리는 허접했다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이 ‘허접쓰레기’를 ‘허섭스레기’의 복수표준어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허접쓰레기’는 비표준어였다. 하지만 언중들은 ‘허섭스레기’의 존재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던 이가 더 많았고 ‘허접쓰레기’를 예사로 썼다. 그런 언중의 언어 관행이 사전을 이기고(?) 복수표준어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쓰인 ‘허접’이다. 2015년까지도 이 말은 ‘허접(許接)’이라는 한자어로만 표준어 대접을 받았다. 고유어 ‘허접하다’는 아예 사전의 표제어에 없었다. ‘허접(許接)’은 ‘도망친 죄수나 노비 등을 숨기어 묵게 함’을 뜻하는 고난도 낱말. 그러다가 2015년 이후에 슬그머니 ‘허름하고 잡스럽다’는 뜻으로 ‘허접하다’가 사전에 올라 표준어 대접을 받았다.
문제는 그처럼 국립국어원이 관리하는 사전에서 빠지거나 새로 등재되는 말들을 떳떳하게 전부 공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분기마다 사전 정보 수정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하고는 있지만 어법 중심의 부스러기들이 대부분이고, 이러한 말들의 삭제/추가가 전부 공개되지 않아 왔다.
그처럼 슬그머니 빠지거나 끼워진 것들을 알게 된 것은 2015년 내 사전 <고급 한국어 학습사전>의 개정판을 내면서 의심스러운 것들을 전부 검색해서다. 그때 슬그머니 표제어에서 사라진 것들이 20여 개 이상 된다는 걸 확인했다. 몇 해 전 우리말 겨루기에서 출제되어 달인 등극에 실패한 빌미가 되기도 했던 ‘갖은양념’이 2015년까지만 해도 두 낱말 ‘갖은 양념’으로 돼 있었을 정도.
국립국어원의 표준어 관리는 빈틈이 많고 아쉬움도 크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사전 관리를 맡고 있는 실무진의 대다수가 계약직이었다. 그래서야... 그리고 사전 관리는 어법 세우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상위 가치는 사전이 언중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엄중한 사실이다. 국립국어원의 사전은 국어학자들의 입씨름 놀이터가 아니다.
정리하면...
‘거시기하다’는 현재 국립국어원이 관리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비표준어다. ‘거시기’가 대명사와 감탄사로만 규정돼 있어서다. 하지만 이것은 조어법상으로도 대명사+하다, 감탄사+하다 꼴의 변전 형태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언중들의 관행을 감안하여 용언으로도 인정돼야 한다.
‘허접하다’는 뒤늦게 표준어로 인정되었지만, 슬그머니 끼워 넣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사전 정보 수정은 어법 중심이 아니라 언중들을 위한 낱말 중심이 돼야 하고,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용어 설명]
어근(語根): 단어를 분석할 때, 실질적 의미를 나타내는 중심이 되는 부분. ‘덮개’의 ‘덮-’, ‘어른스럽다’의 ‘어른’ 따위.
형태소(形態素): 뜻을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 ‘이야기책’의 ‘이야기’, ‘책’ 따위. 기능적 의미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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