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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0같은 말하기 버릇] 초.중등학교의 말하기 교육 강화가 절실하다

[1事1思] 단상(短想)

by 지구촌사람 2023. 9. 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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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0같은 말하기 버릇] 초.중등학교의 말하기 교육 강화가 절실하다

 

남한에서 주말이면 ‘00전망대, 남북의창’ 등의 이름을 달고 방송되는 북한 관련 프로그램들이 있다. 북한 실상을 알리자는 취지로 방송된다. 그것들은 24시간 북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있는 남한의 관계 기관이 제공하는 화면 중에서 선택.편집하여 만들어진다.

 

나는 그걸 보면서 매번 감탄할 때가 있다. 그 화면에 등장하는 북한 주민들의 말하기 때문이다. 일반 주민이나 말단 ‘인민’들인데도 거침이 없고, 앞뒤가 상응한다. 만연체 문장인데도 주어 상실, 목적어 생략 등이 없다.

 

남쪽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말로 먹고 산다는 정치꾼들조차도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힘들다. 간신히 이재명 정도 하나만 눈에 들어온다(나머지 것들은 써 준 것조차도 잘 못 읽는다). 그중 가장 으뜸은 최고 자리에 있었던 박근혜다. 오죽하면 ‘그녜’가 말하면 박근혜 번역기를 돌려야 한다고까지 했을까.

 

댠민국 일반인들의 대화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건, 동문서답형이다. ‘지금 어디냐’고 묻는데, ‘지금 가고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리 답한 사람은 정작 그게 오답인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다. 자신이 잘못 답한 거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 안 한다.

 

또 다른 유형도 있다. 카톡으로 ‘잘 잤냐’고 물었는데 20여 분이나 지나도록 지나서 답이 없자 물은 이는 ‘오늘 아침 별일 없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답이 없자 첫 톡을 보낸 지 30분이 지난 뒤 ‘걱정된다. 아무 일이 없기를’ 하고 보낸다. 그런데 처음 온 답은 ‘잘 잤어’이고 두 번째 답은 짤막한 ‘없어’뿐이다.

 

그러자 처음 안부 인사를 건넸던 사람은 간단한 안부 인사 주고받기에 30분 이상을 허비한지라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지?’ 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토로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그때서야 상대방에게서 ‘조급 급한 일이 있었고, 그걸 하다 보니 답이 늦었다’는 답이 온다.

 

하지만 그땐 이미 아침부터 안부를 걱정했던 이는 마음이 잔뜩 상해 있기 마련이다. 할 일이 있어서 답이 늦은 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 첫 대답에 ‘잘 잤어. 아무 일 없었고 아침에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걸 처리하느라 답이 늦었음. 미안’이라고만 적었더라면 안부 인사를 건넨 사람은 대번에 후유 하면서 안도했을 것인데, 상대는 그걸 건너뛰고서 정반대로 정답을 맨 마지막에, 그것도 안부를 물은 사람이 간접적으로 심사를 담아낸 다음에야 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또한 상대방이 궁금해하는 것[질문한 것]에 대한 오답에 속한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고 빙빙 돈 후에야 정답을 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주 간단한 일상적 질의 응답에도 엉뚱한 답을 해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적 수준인 것은 절반 이상이 그렇다는 점이 우선이고 그 다음은 자칭 지식인층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유식한 척하는 사람들치고 이런 우회적 화법을 고급스럽게 여기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게 진짜 문제다.

 

시장에 가서 ‘이거 얼마요?’ 하고 물었을 때의 정답은 ‘예. 얼마입니다’이고 필요한 말은 그다음에 덧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예. 00입니다. 오늘 새벽에 들어온 싱싱한 건데도, 어제 값으로 드립니다’라든가 ‘예. 00입니다. 이 시장 외에 딴데 가시면 이 값에 못 사십니다. 그런 게 있으면 제가 사신 가격 그대로를 돌려드리고 물건도 드립니다.’ 등으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럴 때도 시장 상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즉 정답부터 말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이른바 머리에 먹물이 들었다는 사람들을 내세우면 정작 가격 얘기는 빼고 뒤의 것들만 장황하게 말한다. 손님이 ‘그래서 얼마라는 겁니까?’라고 되물을 때야 가장 중요한 핵심인 가격을 말한다.

 

그러한 말하기 버릇이 아주 널리 깊이 번져 있다. 엄청 문제다. 왜냐. 그런 화법의 기본 근저에는 의사소통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망각한 채 되레 부수적인 효과(자기 과시, 존재 가치 확대, 언변 자랑...)에 치중하게 하고 그것이 결국은 외양 꾸미기 삶으로 이끄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초중등 교과 과정에 <화법(speech. 말하기)>이라는 게 필수적으로 들어가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국어 외의 별도 과목이다. 거기서 배우는 첫 과정이 ‘yes, no부터 말하라(Yes or no, first!)’이고 ‘최대한 단문(短文. 짧은 문장)으로 말하라’(The shorter, the better), ‘말하기 전 생각부터 하라(Think first, talk later)’, ‘묻는 질문에 답부터 하고 설명을 보태라(Answer first, explanation next)'... 등등이 있다. 토의(Discussion)와 토론(Debate)도 다자 의견 발표인 패널과 심포지움 등도 실습을 통해서 익힌다. 그래서 토론장이 아닌 토의장에서 우리처럼 쌈판이 벌어져 씩씩거리고 회의장 밖에서도 적군이나 원수로 삼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갈수록 대화(말하기) 부분에서 문제가 심각해져 간다. 부부싸움에서 처음에는 어떤 분명한 이슈(문제적 사건)가 있어서 시작했는데 그 해결은 고사하고 서로 상대방의 말버릇이나 상대 배려(감정 몰이해와 감정 건들이기) 문제로 번져서 결국은 이혼으로까지 확전되는 경우, 매우 흔하다. 부부싸움이 서로 상대방에게 상처만 주고 그걸 키워나가는 쪽으로만 발현되는 가정에서, 아주 흔히 벌어지는 익숙한 풍경들이다.

 

그런데 이 대화(말하기) 버릇의 문제점들을 의식하는 이들은 적고 그걸 교육 체계에서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이들은 더욱 적다. 그게 문제다. 그것이 부부간, 부모 자식간의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가로막고(심지어는 더욱 악화시키고), 이웃간의 대화를 단절시키거나 사회적 의사소통 통로를 왜곡/협착시키게 하는데도...

 

그 끝판왕들이 이른바 정치꾼들이다. 예전에는 정치가 낮에는 쌈질 적군이지만, 밤에는 서로 등 두드리며 술잔을 나누는 적과의 동침 시대여서 이른바 타협 정치라는 그럴 듯한 결과물들이 나왔지만, 요새는 적군 장수가 단식을 해도 위문 방문조차 안 한다. (예전엔 형식적이든 진심이든 적군 사령관이 단식을 하면 최소한 위로/중지 권고 차원에서라도 찾아가는 인간적인 모습들은 있었다)

 

말 버릇. 그건 그 사람 내면의 외면적 총화다. 어떤 이의 말 버릇을 보면 그의 사고방식, 잠재의식, 사회화과정, 인간관계... 등을 대충 짐작해내기 어렵지 않다.

 

저 위에 언급한 동문서답형인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은 이렇다: 자칭 똑똑이지만 실제로 살아오는 과정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그런 대로 똑똑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2~3류 대학 출신일 때가 많거나 고졸 출신이다). 학력 콤플렉스가 은근하다.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이혼/사별한 경우가 많다. 독서나 신문 읽기 등에서 남들에게 빠지지 않는다고 여긴다(지성인 그룹에 속한다고 여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신은 결단코 말하기 등에서 빠지는 실력은 아니라고 자부한다(그들은 그럴 듯한 자리에서 하는 말만 말하기로 여긴다). 자신은 은근히 지적이고, 당연히 지성인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물질보다는 정신 쪽을 중시하는 상부 계층에 속한다고 여긴다... 등등. 한마디로 그들의 말버릇을 망친 주범 중의 하나는 콤플렉스다. 우회 화법, 회피/기피 화법, 도약 화법 등을 쓰는 이들의 밑바닥에는 콤플렉스의 뿌리가 칡뿌리처럼 굵고 깊이 박여 있다.

 

다 좋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삶의 대화에서 ’이거 얼마요?‘ 하고 물으면 ’예, 얼마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정답이다. 그 손쉬운 걸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리거나 군더더기부터 내미는 사람은 그 손쉬운 정답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허비하는 정신적 허영족/낭비족일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일상생활의 총합, 곧 인생에서의 뒤늦은 쓴맛 씹기뿐이다 (실제로 말년에 이르기 전에도 그들의 가슴 안에는 자주 찬바람이 자유통행한다). 내가 달고 사는 말, 다시 한 번 적는다: "언어가 그 사람이다"

 

국어 과목의 고정 평가 항목은 ‘읽기/말하기/듣기/쓰기’다. 하지만 요즘의 교육 현장을 보면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고, 말하기/듣기는 교사들조차 잊고 지낸다. 하기야 교사들 자신의 이 항목 점수가 낮다. 잘 듣는 훈련이 안 돼 있어서 교사 회의는 중구난방이고, 공개 수업 발표 등에서는 입문 소개에서부터 어법에서 벗어나는 말들로 넘쳐난다.

 

2022년부터 서울대의 교양 필수 과목에 <글쓰기1> <글쓰기2>가 들어갔다. 명색이 서울대생들인데 글쓰기 실력을 보니 하도 기가 막혀서다. 교사들의 개인 블로그 글에 들어가 보면 그가 교사인지 어떤지 헷갈리는 이들이 절반을 넘긴다. 아이들의 쇠발개발 글과 거기서 거기라서. 그게 우리나라 국어 교육 현장의 민낯이다. 그리고 그 피해를 지금은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조차도 고스란히 껴안고 지낸다. 자신들이 그 피해자라는 것도 모른 채. 애고(哀苦) 애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8 Sep.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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