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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위대함과 도연명의 시 <形贈影(몸이 그림자에게 줌)>의 한 구절: 願君取吾言(원군취오언) 得酒莫茍辭(득주막구사)

갓 쓰고 서울 오다

by 지구촌사람 2023. 9. 1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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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위대함과 도연명의 시 <形贈影(몸이 그림자에게 줌)>의 한 구절: 願君取吾言(원군취오언) 得酒莫茍辭(득주막구사)

 

지난주던가. KBS의 명품 장수 프로 중의 하나인 <진품명품>에 아래의 행초서체의 8폭 병풍 하나가 나왔다.

사진: 창암 이삼만의 8폭 병풍 서예작(추정 감정가는 아쉽게도 겨우 천200만 원.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서예 작품의 값어치가 전반적으로 매우 낮다. 저 가격이면 쪽당 150만 원밖에 안 되는 값.)

조선 후기 3대 명필가의 하나였던 창암 이삼만의 작품이란다. 창암은 벼슬도 마다하고 전라도에 머물면서 오로지 서예에만 전념한 분이란다. (나도 그 프로를 보면서 처음 그 이름을 대했다)

 

행초서체는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쉬 알아볼 수 없는 서체다. 초서는 상호간의 약속된 약어체를 쓰기 때문에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지만, 익히고 나면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리한 서체다. 한문에서의 속기사 필체라 하면 이해하기 쉽다. 해서체로 쓸 때보다 속도가 엄청 빠르다. 붓을 떼지 않고 한꺼번에 휘두르기(?) 때문이다. 일필휘지라 할 때의 그 속도감을 떠올리면 된다. ㅎㅎㅎ

 

행서는 약간의 날림이 있지만, 따로 익히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서체다. 아래 작품에서 맨 왼쪽에 보이는 天地長不沒(천지장불몰),山川無改時(산천무개시) 등이 대표적인 행서체다.

 

사진: 행초서체의 출품작. 8폭 중 왼쪽의 4폭 속 글씨

나도 그날 새삼스럽게 배운 게 하나 있다. 한문 서체들, 곧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등의 발달 순서다. 가장 또박또박 쓰는 해서체, 곧 한석봉의 천자문 등에서 보이는 서체가 가장 늦게 등장했단다. 나는 지금까지 해서체가 행서나 초서체보다 먼저 나오고 그걸 좀 빨리 쓰기 위해서 나온 게 행서와 초서로 여기고 있었다.

사진: 한자 서체의 발전 순서를 설명하는 전문 위원.

 

 

그건 그렇고... 그날 나온 것은 진나라의 명품 전원시인답게 오류(五柳)선생으로도 불렸던 도연명의 시를 제재로 창암 선생이 썼던 서예 작품이었다. 짧은 벼슬살이 후 낙향한 도연명의 나이 49세 때 비로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관조하게 되었을 때 썼던 시작(詩作)의 일부.

 

그때 감정위원이 도연명의 작품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뒤 연예인 감정단에게 재미있는 문제를 냈다. 맨 마지막 구절 願君取吾言 得0莫茍辭(원컨대 그림자여 그대는 내 말을 듣고, 0 생기면 구차히 사양하지 말게나)에서 0가 무엇이 가장 적합할 것인가 하면서 객관식 고르기 문제를 냈다.

그 답은 술(酒)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답이 왜 술인지를 알려면 그 시의 전체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문을 이해하면 해답이 보이니까.

 

形贈影 <몸이 그림자에게 줌>

 

天地長不沒(천지장불몰),山川無改時(산천무개시)

草木得常理(초목득상리),霜露榮悴之(상로영췌지)

謂人最靈智(위인최령지),獨復不如茲(독부불여자)

適見在世中(적견재세중),奄去靡歸期(엄거미귀기)

奚覺無一人(해각무일인),親識豈相思(친식기상사)

但餘平生物(단여평생물),舉目情淒洏(거목정처이)

我無騰化術(아무등화술),必爾不復疑(필이불부의)

願君取吾言(원군취오언),得酒莫茍辭(득주막구사)

 

천지는 영원하여 다하지 않고 산천은 바뀌지 않는다네.

초목도 변치 않는 이치를 알아 서리와 이슬에 시들었다 다시 피네.

사람이 가장 존귀하여 지혜롭다 하나 사람만은 산천초목과 같지 못하다네

이제 막 세상에 사는 것을 보았는데 홀연히 떠나니 돌아올 기약이 없구나

 

한 사람 사라진들 어찌 깨달으며 친지인들 어찌 그대를 그리워하랴

다만 생전에 쓰던 물건만 남아있어 바라보고 마음 서글퍼 눈물 흘리네.

내게는 신선되어 하늘에 오를 방법 없으니 반드시 죽게 될 것 다시 의심치 않네

원컨대 그림자여 그대는 내 말을 듣고 술 생기면 구차히 사양하지 말게나.

 

[사족] 한문구 해석이 도움이 되는 해설을 덧대면 아래와 같다.

 

○ 長不沒(장불몰) : 영원히 끝나지 아니함. 長은 항상의 뜻.

○ 無改時(무개시) : 바뀌지 않는다.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 常理(상리) : 당연한 이치.

○ 榮悴(영췌) : 피었다 시들음.

○ 不如茲(불여자) : 그들(천지초목)과 같지 않다. 茲(자)는 그것.

○ 適(적) : 지금 막. 어쩌다가.

○ 奄去(엄거) : 갑자기 사라짐. 즉 죽음.

○ 靡(미) : 아니다. 다하다.

○ 奚覺(해각) : 어찌 깨달으랴.

○ 無一人(무일인) : 한 사람이 없어지다.

○ 親識(친식) : 친척과 친구.

○ 洏(이) : 눈물 흘리는 모양.

○ 騰化術(등화술) :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 술법.

○ 爾(이) : 그러하다. 즉, 죽는다는 뜻.

○ 苟(구) : 구차하게. 진실로.

 

요컨대 천지 자연과 사물은 어찌 해도 불변이지만, 인간은 신선이 될 길도 없으므로 죽어 살아지는 존재. 그러니 술 생기면 사양 말고 마시면서 그냥 다 내려놓고 즐기다가 사라지라는 시다. 이 시의 제목은 形贈影 <몸이 그림자에게 줌>이다. 인간으로서 잠시 형체외형)를 빌려 지내다가 사라지는 존재를 그림자로 보면서 현실이 정신에게 말을 건네는 식으로 돼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도연명의 복합시 <형영신(形影神)> 중의 일부다. 형영신(形影神)은 서문 및 형증영(形贈影:몸이 그림자에게 줌), 영답형(影答形:그림자가 몸에게 답함), 신석(神釋:정신의 해명)의 3수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몸과 정신, 그리고 정신의 완성체(神) 단계로 그 설정이 점점 높아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 보인 형증영(形贈影)은 몸이 정신에게 툭툭 던지는 말 걸기쯤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첫 수에서는 천지자연은 영구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짧으니 영구함을 갈구하지 말고 살았을 때 가벼이 즐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덜어내기와 가벼운 즐기기 방법으로 음주를 권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첫 수는 도연명 식 권주가(勸酒歌)도 된다. 다만 술 한잔하면서도 불변인 천지자연의 이치와 하잘것없는 인간의 대비를 잊지 말고 하라는 무거운 성찰을 조건부로 내걸고 있다.

 

하기야 성현들은 술 한 잔의 의미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동서양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서 대주가란 공통점을 지닌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술이 사람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으로 설파하기도 했다. 일례로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그다음날 아침에는 전혀 술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나온다. (그는 큰 잔으로 마셨고 함께 대작하던 이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혼자서 계속 마셨다.)

공자 역시 매일 술을 달고 살았는데, 특징은 밖에서 파는 술은 한 모금도 안 하고 집에서 담근 것만 먹었다. 지금도 중국 명주의 하나로 꼽히는 공부가주(孔府家酒)는 공자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술 담그기 방식으로 빚은 술인데, 공장 규모가 자그마치 10만 평쯤 된다. 병 고침을 뜻하는 ‘의(醫)’도 ‘앓는 소리 예(殹)’와 ‘술 유(酉)’를 합친 글자로서, 본래 화살이나 몽둥이에 다쳐 아픈 사람을 술로서 치료한다는 의미였다.

 

이 술 즐기기의 과정에도 실은 금이 많이 그어져 있다. 술 먹고 정신이 졸(卒)하면 ‘취할 취(醉)’다. 취하여 귀신처럼 용모가 흐트러지면 보기가 싫다. ‘추할 추(醜)’자로 변한다. 술에 취했다가 정신이 반짝반짝 돌아오면 ‘깰 성(醒)’이다. 이처럼 취(醉)와 성(醒)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간극은 큰 강처럼 벌어져 있기도 한다.

 

우리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고 할 때 흔히 ‘대작(對酌)’한다고 말한다. 이 ‘술 부을 작(酌)’은 ‘술을 적당히 마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작(勺)’은 한 홉의 십분의 일이다. 술꾼들에게 '작작 마시라'고 잔소리할 때의 고정 낱말이기도 한 이 '작작'은 현재 '너무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를 뜻하는 고유어로 돼 있는데, 아무래도 어원학자들이 덜 생각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ㅎㅎㅎ.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15 Sep.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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