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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한 여자, 그녀가 사랑한 남자

[내 글] 연담(燃談)

by 지구촌사람 2013. 3. 30.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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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애착, 혹은 그녀가 사랑할 때 사랑하지 않은 여인

 

                  그가 사랑한 여자, 그녀가 사랑한 남자

 

  그가 그녀에게 바란 것은 네 가지였습니다. 다른 남자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그녀가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여자였으면 했고, 그녀의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아니면 그 사이가 원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튼튼한 사람이기를 바랐고, 맛있는 식탁을 꾸리는 사람이면 된다고, 더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그는 그녀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 둘 떠올리자 저절로 그의 안에서 정리된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혼자서 그의 사랑에 구체적으로 입혀 본 색깔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생머리가 아니더라도 상관없고 늘씬한 미인이 아니더라도 관계없을 뿐만 아니라,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아주 잘사는 편이 아니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오히려 그것이 편했습니다. 그녀가 다녔던 학교도 그다지 내세울 만한 곳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도 나중에 같이 살면서 서로 무식하네 어떻네로 다투지 않을 것 같아서 기분은 오히려 홀가분했던 그였습니다.

   우선 그는 그녀가 함께 지내게 되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말을 쉽게 자주 하는 여인이었으면 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더라도, 우선 그에게만이라도 자주 그런 말을 입밖에 내는 여인이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그녀를 위해서 어떤 조그만 선물을 해주거나, 그녀를 배려해서 양보를 하거나, 그녀가 어떠한 일로 늦게 되어도 아무 소리 없이 오랜 시간을 기다렸거나, 그가 그녀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었을 때도,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고맙다는 말 한 마디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싶을 것 같았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 고마워' 소리를 한 마디 들으면 정말이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 거라고, 그리하여 그가 그녀를 한 번 더 안아주게 될 것이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서 배시시 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야 얼마든지 그녀가 그를 위해 늘 해줄 수 있는 것이어서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장 손쉽게 감사하는 방법은 그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어서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기심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턱없는 자신의 욕심을, 손쉽게 버리는 길인 것 같아서였습니다.

   은근한 자만심이 쓸데없는 아집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남 보기에도 아름답지 못한 고집과 욕심으로 발전하는 그 첫걸음은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그는 절실하게 체득해가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그 다음, 그가 그녀에게서 발견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것은 그녀가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언행 어디에서고 그녀가 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편린이 드러나기를 꽤나 고대했습니다. 혹시 엄한 아버지였거나 또는 마음이 꽤나 강퍅한 분이어서 어린 시절 그녀가 받았던 사랑의 양이 모자랐거나, 어머니와의 잦은 언쟁으로 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아버지라 하더라도, 딸이 장성한 지금은 두 사람 중 어느 하나가 노력하여 이제는 그 기억들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기를 바랬습니다. 딸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늘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비는 그런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엉키는 그런 사이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는 결혼한 아내가 남편에게 대하는 모든 태도의 출발과 종착점은 친정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이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는 어느 선배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늦깎이 결혼이어서 저절로 다른 사람들의 결혼 생활을 많이 엿보게 된 그 자신의 관찰로도 그 말이 무척 믿을 만하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다툼들이 끝내는 파경으로 이어지는 주변 사람들의 경우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 나름대로 얻은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요즘의 미인형에는 짧게만 시샘하고 길게 주눅들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했습니다. 키만 멀쑥하게 크고 비쩍 마른 이가 아니기를 바랬습니다. 전국의 고교 1년생 평균 체중이 53킬로에 가깝다는 그런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키가 작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몸무게가 최소한 55킬로 정도는 나가는 실팍한 여인이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김혜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민영 정도로 통통한 사람이었으면 싶었습니다. 미끈한 다리를 자랑하는 데릴 한나보다도 맏며느리감으로 후덕해 보이는 질리언 앤더슨에게 더 눈길이 머무는 그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닦달하지 않음으로써 체득하게 되는 삶에 대한 여유, 곧 세상에 대한 여유는 넉넉한 몸매에 깃들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래야만 그녀가 굳이 생활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해내지는 않더라도 같이 운동도 하고 산에도 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오래 걸어도 짜증내지 않는 그런 여인일 것 같았습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거나 콩콩 뛰면서 땅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습니다.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쉴 시간에, 또는 쉬는 날에 집에 머물기를 더 좋아하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또 하나 바란 것은 늘 풍성한 먹을거리로 장만한 것은 아닐지라도 밥상에 앉을 때마다 군침을 흘리며 수저나 젓가락을 들고 어느 것부터 맛볼까 망설이게 하는 그런 식탁의 분위기였습니다.

   철이 바뀌면 달래를 넣은 간장으로 밥을 비벼먹기도 하고, 그 흔하고 값싼 쑥을 사다가 하루는 국으로 다음 날은 된장찌개로 먹을 수 있으면 오죽 좋으랴 싶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맛있는 반찬이 굳이 비싼 재료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반고등어도 좋고 손가락 굵기보다 조금 더 큰 갈치, 남들의 시선에 오래 잡히지 않는 말린 서대, 하다못해 비싸지 않은 코다리라도 좋았습니다. 이따금 밥상에는 그런 것들이 올라서, 그의 젓가락이 어디로 먼저 향해야 할지 즐거운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습니다. 그가 미리 그려본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가 취미 삼아 긁적이는 글들이 눈에 띄는 독자 투고로 뽑혀서 생활 잡지의 이곳저곳에 게재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이게 웬 떡인가 싶었습니다. 살아가는 틈틈이 글을 쓰는 여자. 그 얼마나 멋있는 얘기입니까.

   하루하루 살아내기에도 벅찬 요즘, 삶의 낙수를 헤집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붙여서 다시 우려내는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한없이 멋진 사람이고, 어쩌면 자신에게는 벅찬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습니다.

 

                                                   *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몹시 뛰었습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데다 남부럽지 않은 학벌을 갖추고 있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상한 편인 데다 소년 소녀 가장의 후원자 노릇도 하고 있고 게다가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하느라고 심심한 적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와 함께 할 장래의 삶은 속살이 포동포동할 것만 같았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그와 함께 바라보는 별밤은 별들이 모두 두 사람의 가슴 위로 내려와 쌓이는 그런 밤들이지 싶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서 라디오를 앞에 두고 별밤지기 수다를 듣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는 그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일반화시킨 기준치로만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만이 하는 말로 그녀에게만 전해질 이야기들을 해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글을 쓰는 그녀 못지않게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만의 언어를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중간에서 오가면서 그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은 이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그녀 나름대로 짚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녀의 그런 판단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가슴은 내내 뛰었습니다.

 

   혼사와 관련해서 어디서든 주눅부터 들게 되는 그녀의 나이를 두고도 그는 세상 경험을 그 만큼 많이 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그가 틀림없이 웬만한 일상사로도 여인을 오래오래 감동시키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는 걸 신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가 자주 싱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 대신 푸근하고 넉넉한 가슴을 더 많이 그녀에게 보여주는 사람이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곤란한 질문이라도 받으면, 자리를 고쳐 앉으며 가슴을 내밀 때 그의 널찍한 가슴이 저절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그는 어쩌다 다림질이 되지 않은 와이셔츠를 입게 되어도, 오늘은 새로운 패션을 입게 되는군 하면서 그의 옷가지 하나가 그녀의 바쁜 일상에 끼여든 건망증의 한 가지쯤으로 여기면서 가볍게 넘어가지게 되리라고 미리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더분한 부모 밑에서 누나들의 사랑까지도 받으면서 자라났다고 하니 당연히 그 정도쯤은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게다가 반듯하고 깔끔한 외모라니 그가 집에 돌아오면 늘 손발을 깨끗이 하는 것쯤이야 기본일 것이라고 미리 단정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영화를 좋아한다지 뭡니까. 요즘 웬만하면 젊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체하는 연애 시절 한 때만 빼고는 쉬는 날에도 영화 얘기가 나오면 아침부터 뭉개고 있던 소파 위에서 아예 벌렁 누워버리는 일 천지라는데 말입니다. 그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전철까지 타고 가서라도 보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식구들이 다 잠든 늦은 밤에 아직도 혼자서 끝까지 티브이 영화를 보고 자는 그녀와는 천생 배필이었습니다.

 

   그와의 결혼 생활을 미리 떠올리면 그녀는 마냥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그녀가 주변 사람들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그녀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마음먹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들까지도 죄다 되살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될 것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가 노상 그녀에게 잔소리처럼 해대던 말, 그 잘나지도 못한 게 엉덩이에 뿔부터 나 가지고 한다는 짓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게 전혀 흠집도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유명짜한 출신 학교를 거명하는 여인들을 되레 몹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유명하기는 고사하고 그 남자와 비교해도 한참이나 뒤질 것 같은 아비의 구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리고 평생을 어머니의 주름만 더하게 하는 데 더 능사였던 아버지의 그 질긴 입심의 기억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날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그 남자의 그늘 속으로 옮겨지는 순간 말입니다. 정말이지 단 한 구석도 맘에 들지 않은 아버지에게 늘 뚜껑 달린 밥공기로 밥을 담기를 고집하던 엄마의 그런 어두운 삶을 자신은 살아내지 않을 자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만나서 사귀면서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처음 만나기 전의 그 커다란 설렘에 이끌려 내친 김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오래지 않아 갈라섰습니다.

 

   가정법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옆에서 말없이 함께 걷고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 잘난 자식 참 더러운 놈이었어. 손발은 물론이고 이빨도 잘 안 닦는 주제에, 그 입으로 챙기는 거라고는 제 먹을 것 입을 것이 우선이고 말이야. 조상 중에 못 먹고 죽은 조상이 있는지 맨날 먹는 것만 입에 달고 지내는 거야. 마누라를 무슨 튼튼한 기계로만 여기면서 말야. 사내들은 죄다 저 챙겨주기만 바란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어. 여지껏 내 먹고 싶었던 스파게티 한번 둘이서 먹어보지 못했다니까. 결혼할 때는 정말이지 뭐가 내 눈과 귀를 단단히 가렸었나봐...... 그 사이 아이라도 생겼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남자가 했다는 말도 바람결에 들려왔습니다.

  -그 잘난 여자가 챙긴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어. 결혼 전까지 고맙다는 소리 한번 안 할 때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남편 알기를 개밥의 도토리쯤으로 여기더군. 츨근길에 따뜻한 밥 한 끼니 제대로 얻어먹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니까. 나 참 더러워서. 게다가 맨날 낭만 타령만 해대는데 낭만이 밥을 먹여주나 옷을 사 주나. 내 눈에 뭐가 씌어도 한참 씌었지...... 역시 사람 속은 살아봐야 알고, 여자 손발이 예쁜 건 일할 때 봐야 안다는 말이 맞긴 맞아. 여자는 살림 잘하는 게 최고야, 암 최고고말고. [06/05/2000]

                                                                         -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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