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사카행 뱡기 안 (좌)과 서울 집앞에서의(우) 우리 공주님...
지난 6월 초순, 월드컵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이다. 전철 안에서도 붉은 물결이 제법 눈에 띄기 시작했을 때, 부평에서 사람을 만난 뒤 나는 점심도 거른 채 서울로 올라가는 전철에 서둘러 올랐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그날 있을 경기를 보기 위해서. 전철 안은 이미 서울 거리 응원에 참석하려는 젊은이들로 제법 붐볐다. 갈수록 차에 오를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 같아서 나는 문간 쪽을 피해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때다. 내 앞에 앉아있던 젊은이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자리를 권해 온다. 앉으세요... 나는 손사레부터 치면서 그냥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 서둘러 말꼬리를 달았다. 고맙긴 하지만, 나, 아직 자리 양보 받을 나이는 아니여.
하지만, 그 말 몇 마디를 하면서,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도, 얼굴은 자꾸만 화끈거려온다. 내가 벌써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것처럼 늙어 보인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연신 도리질을 쳐대고 싶은 황당함과 면구스러움에다, 나는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닌데...하면서 어떻게라도 버텨보고 싶은 어떤 깡다구 같은 걸 챙기며 얼버무리느라 바빴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노인(?) 대우. 동안(童顔)이어서 그 동안 사회생활에서 적지 않은 불편까지 겪어왔다. 삼십대인데도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어려 보여서, 외국살이에서는 한때 콧수염을 기르기까지 했다. 위아래를 은근히 따지는 서울살이에서는 나이 들어보이는 부하직원과 일부러 동행해서 일을 보기도 했고... 그런 내가 벌써 나이 지긋한 어른으로 떠밀려나고 있단 말인가.
혹시 머리 때문인가. 하지만 그도 아닐 것이다. 서너 군데 분포된 흰머리를 새치라고 빡빡 우겨대고 싶은 심정으로 그 동안 염색을 미뤄오다가, 그게 불규칙적으로 희끗거리는 바람에 더 보기 싫은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헐수할 수없이 염색도 시작했다. 덕분에 머리칼도 까만 편이다.
그렇다면 조금 빠진 그 소갈머리 없는 <속알 머리> 때문인가. 사십 대 후반에 들자 어느 해 몇 달 사이에 갑자기 시작된 증상이긴 하지만 그도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그 정도만으로 벌써 노인 대우를 받는 건 황당하고 억울하다. 아무래도 사람들 보는 데서 노인 공경까지 멋지게 해내고 싶어진 그 젊은 악마의 과잉도덕심 탓이겠거니 싶기만 하다. 그걸로 억지 위안을 해본다. 위안 삼기를 자꾸만 연습한다.
*
나이 들기. 그건 인간의 성장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60조쯤 되는 몸안의 세포들이 분열을 거듭하여 그 숫자를 늘려가는 생물학적 현상. 하지만, 그게 무한정 이뤄지는 건 아니다. 한 개의 세포들은 대개 50회 내지 100회 정도만 분열한다. 그러면 세포의 수명도 끝난다. 실험실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적은 횟수에서 끝난다고 한다.
노화는 바로 이 세포분열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세포분열의 종결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세포의 존속기간이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도 있고 (텔로미어 이론이라고 하든가), 몸 안에 쌓이기 시작한 부산물(노폐물) 때문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인간의 육체적 성장은 한껏 늦춰 봐도 20대 후반 전후에서 멈춘다. 그 이후는 내내 늙어가는 과정, 곧 노화로의 내리막길 여정이다. 예컨대, 인간의 수명을 70세라고 했을 때 성장은 25세 전후에서 멈추니, 그 이후의 긴 시간들은 노화 과정이다. 젊음과 노화의 비율은 25년대 45년, 곧 5:9가 되어 노화 기간이 훨씬 더 길다. 이걸 하루 시간으로 비유하자면, 24시간 중 8시간 반 정도만 청춘이고 나머지 15시간 반은 내내 늙어가는 과정이라는 말도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장하기보다는 늙을 운명을 더 많이 타고난 존재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늙기 위해서라는 말도 된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엄존하는 진리다. 어느 날 갑자기 늙은이 대우를 받아서 황당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늙어가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거나, 그렇게 여기려고만 하는 것 또한 심한 착각에 속한다. 육체적으로만 보자면 인간의 젊음은 정말 짧다.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자면, 인간이 성장을 멈추고 노화로 진입하기 직전의 지속시간, 곧 최후로 성장하는 기간은 대단히 짧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최후의 생장점 지속시간은 한 시간도 안 된다. 5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즉, 우리들이 최후로 청춘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육체적인 시간, 달리 말해서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실제로 육체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마지막 청춘은 5분에서 잘해야 한 시간 안쪽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귀하게 여겨야 할 시간의 길이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도 될 수 있다.
*
5분에서 한 시간 정도로 주어지는 마지막 청춘. 그 시간에 우리가 진정으로 신나게, 멋있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살이에 등 떠밀려 오느라 내내 미루기만 하고 그러는 사이에 더욱 아쉬워진 어떤 것들 중에서 그 시간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차 안의 동행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분기별로 한 번씩 작가의 고향이나 활동무대들을 찾아가는 그런 모임에서 여러 해째 만나는 이들이라 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나마 나름대로 글줄들이나 써대는 사람들이라서 뭔가 다른 생각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다.
그런데 답의 내용들은 의외였다. 상세내역은 갖가지였지만 어떻게 해도 이야기는 한 군데로만 모였다. 사랑 얘기. 가족과 아이들을 챙기겠다는 이에서부터, 뒤늦게라도 첫사랑에게 사랑고백을 하겠다는 사람, 평소에 챙기지 못한 이런저런 이들을 마음속으로 돌아보겠다는 사람까지 별별 얘기들이 나왔지만, 요컨대 그 핵심 낱말은 사랑이었다. 미진해서 더욱 아쉬운 사랑에 그 최후의 시간들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이가 최후의 시간으로 5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 내내 사랑하는 사람과 뽀뽀를 하겠노라고 했을 때는 모두 웃었다. 뽀뽀에 한 맺힌 귀신 하나 나왔다는 너스레에 사람들은 또 한번 웃었지만, 웬일인지 그 뒤로는 사람들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수들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윽고 차 안에는 까닭 모를 적막이 새벽 안개처럼 서려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최후의 5분에 할애하고 싶은 뽀뽀를 그동안 어째서 미뤄오기만 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을 때다. 옆자리 사람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려왔다. 최선생님은 그 최후의 5분에 뭘 하실 거여요?
글쎄......
문제적 질문의 발제자(發題者)치고는 신통치 않은 대답이 내게서 나갔다. 사실 나 역시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답이 떠오른 게 아닌 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동행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뱉은 그 사랑 결핍 증세가 내 머릿속을 꽉 채워오고 있었다. 농담으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날카로움을 다 숨기지 못한 만성질병. 그 예사롭지 않은 무딘 통증들...... 사랑이 이르지 못한 곳에 고이고 있는 외로움들이 서로 다른 모습들로 겹쳐지면서 내 가슴 안까지 알싸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늘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최후의 청춘 5분. 그리고 그것들을 습관적으로만 대하는 사이에 어느 새 윤기를 잃어버린 우리의 육체와 정신. 매너리즘은 우리의 삶에서 윤기를 빼앗아가고 꿈을 박제한다. 그리하여 늘 사랑에 목말라하면서도 생기를 잃어버린 육신은 버릇처럼 꿈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헐벗은 채 흔들리게 마련인 사랑의 꿈들. 형해(形骸)로만 더욱 또렷해지는 사랑. 그 절박한 악순환...
나는 한숨 한 조각을 길게 얕게 차내로 날렸다. 내게 질문을 던진 동행도, 최후의 5분간 뽀뽀만 실컷 하리라던 여인도, 눈을 감고 무거워진 머리들을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옆자리의 그가 내게 한 번 더 채근해서 물어온다면, 나는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꼬옥 잡고 노을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나란히 앉아서 최후의 내 청춘 5분을 보내고 싶다는 말을, 최후의 5분은 어떻게 해도 사랑과 한 몸으로 머물고 싶다는 말을, 입밖으로 끌어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해도 듣는 이에게 낯이 조금은 훗훗해져오는 일이었다. 진실한 사랑의 소망. 그 모습은 어떻게 해도 알몸일 것이므로......
하기야, 거기에 젊음과 늙음의 구분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으랴. 마지막 사랑인 것을. [Dec.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