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가(生家) 혹은 성충가(成蟲家)
지난 9월 24일 일요일.
추석 2주전 주말은 우리 고정 벌초날이다.
사촌과 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벌초를 했다.
부모님 산소를 하고 나서다.
벌초를 마치고 나면 늘 그랬듯이 산 아래를 내려보며
기억속에 버려두다시피 하던 마을을 돌아보는데......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떠 있는 섬은 연도.
그러다가 내 시선이 멈췄다. 어느 한 곳에.
바로 사진 중앙부 좌측에 어둡게 파인 곳.
좌측으로 길게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
조금 당겨서 바라보면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옆으로
공터 비슷한 것이 보이고, 그 옆으로 숲들이 이어진다.
바로 저곳이 내 마지막으로 머물던 고향집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젠 홀로 남은 집터가 미루나무와 밤나무 사이로 퀭한 눈만 같다.
숲처럼 보이는 것은 밤나무 과수원이었고.
우리 식구들은 1967년말-1985년간에 저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하지만, 나는 한 해도 제대로 머물 수 없었다.
고교 진학으로 집을 떠나오는 바람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1985년 이후로 모든 것이 저절로 정리된 고향.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 저곳이었는데,
이제는 집터 흔적도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매각 당시만 해도 양철 지붕을 이고서
사랑채 따로 매달고 있던 4칸 집이었는데...
이제서야 두 분 부모님들께서 조상이 머무시는 곳에 드시지 않고
저 집터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어하셨던 까닭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당신들이 계시지 않으면 집터마저 쉬 사라질 것을 미리 짐작하셨음일까...
내친 김에,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는 길에 차를 멈추고 돌아보기로 했다. 물론 주인이 바뀐 집.
서천-비인 국도변에서 100미터나 떨어졌을까.
새벽이면 도로를 달리는 트럭 엔진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다가가서 본 옛집. 생가(生家)라고 하자니 좀 걸린다.
내가 저기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다.
유년 시절과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을 저기서 보내고,
저기서 비로소 생식 능력을 갖춘 성충이 되어 서울로 왔으니
성충가(成蟲家)라고나 해야 할까.
저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얇은 석판(청석)으로 지붕을 이었던 너와집이었는데,
주인이 바뀌고 나서는 저처럼 청기와 벽돌집으로 변모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집의 뒤편인데, 뒤편에 우물이 있었고,
나는 그 주변에 식목일이면 산수유와 벽오동을 심었었다.
초등학생 시절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중에 커서
쓸모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들이 나중에 크게 쓸모가 되었지만, 내 몫은 아니었다.)
그늘 속에서 바라다 본 하늘 빛이 그 날 따라 더 맑았지 싶다.
고. 향. 하. 늘.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부채꼴 모양으로 압축된다.
집앞의 창고들과 마당, 그리고 본채가 있고 그 뒤로 이어지는 텃밭과 또 다른 긴 밭.
지금은 울 뒤의 텃밭인 곳이 본래는 대나무밭이었다.
그걸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셋이서 겨울방학 동안에 죄다 파내느라
하마트면 이 초등학생 허리 부러질 뻔했다. ㅎㅎㅎ.
사진 하단 좌측으로, 가운데가 네모 반듯하게 훤한 색으로 드러난 곳이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운동장. 교사(校舍)도 줄어든 듯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공주와 폼을 잡아봤다.
내가 공주 나이 때부터 머물렀던 저 그늘속에서...
딸에게 아비의 생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비의 껍데기 하나를 또 그렇게 벗었다.
내가 무사히 유충기를 벗어나
성충기로 접어들게 해주었던 바로 그곳.
내 육신의 껍데기 벗기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감싸줬던 고향.
그때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집.
나의 成蟲家를 딸의 껍데기로 해 입혔다.
[Oct.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