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에게 배우기 : 홀로 있음과 성찰, 그리고 성장
작년 유현진을 다룬 티브이 프로그램을 우연히 대했다. 아마 10승 고지를 넘어섰을 때였던 듯하다. 진출 첫 회의 적응 성공을 넘어, 몇 승까지 거둘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었으니까.
프로그램의 중간쯤부터 보았기 때문에, 앞서의 내용은 무엇인지 몰라도 내가 본 부분은 엘에이의 어느 후덕해 보이는 한식당 사장님이 유현진을 위해 밑반찬들을 싸서 들려 보내는 장면이었고, 이어서 그의 집을 찾은 몇 사람에게 자신이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하면서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유현진은 그다지 유식하지 못하다. 운동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부족했겠지만 그 자신이 그다지 학업 쪽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공부와 운동 양쪽을 모두 잘해내는 특출한 인재들은 드물고, 그래서 하늘은 공평하다. 양쪽 모두에서 1등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하하하.
하지만, 그날의 인터뷰는 웃음과 어눌함을 잘 버무린 편안한 대화 속에 무언가 눅진한 알갱이가 녹아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몸 속 전체에 깊이 배어 있는 생각들이 저절로 불쑥불쑥 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선입견으로 미리 착실하게(?) 우려하던 것과는 판이했다.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 와서, 그것도 동양인이라면 무조건 한 급 낮춰서 보는 미국에서 경쟁자와 동료를 겸하는 사람들 속으로 내던져져 홀로 살아가기. 말도 잘 안 통하는지라 자칫하면 오해를 받기 십상인 그런 위태한 주변 환경을 조심스레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면서도 반드시 생존해 내야 하는 미숙한 20대 사냥꾼 유현진.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압착된 상황과는 무관하게, 떠나온 조국에서는 청년 영웅으로 떠받쳐지고 있는 행운의 아이러니...... 실패하고 돌아가면 이내 우물 안 개구리로 손가락질 받게 될 세태와의 운명적 대치가 떠오르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곤 하는 이중의 압박감. 유현진은 사방을 둘러보며 불안하게 사주경계(四周警戒. ‘사방을 두루 경계하는 일’이라는 뜻의 군사 용어)를 해야 하는 신참 초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유현진이가 그날 국적 방송과의 인터뷰이므로 어쩌면 자신이 겪었던 그간의 정신적 고통을 조금은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으로 털어놓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 내용이나 태도는 우리의 판에 박힌 예상과 달랐다. 아주 크게 달랐다.
그는 인터뷰어가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면 ‘~라고 생각했습니다’란 답 대신에 ‘이렇게 이렇게 했지요 뭐’ 식으로 대답했다. 생각의 내용을 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취한 행동의 내용을 답했다. 그리고 아주 까다로운 개인적 질문, 예컨대 ‘고국에서 자신의 실투 내용을 좋지 않게 올리는 팬이 있을 때 그 생각으로 잠을 설친 적이 혹시라도 있지 않은가’와 같은 질문에서는 ‘그 팬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문제적 팬의 행동에 대한 느낌이나 평가 대신, 그 팬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잠을 설치거나 하진 않았고 그처럼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짚어준 셈이기도 하니 도리어 고마운 일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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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진은 1987년생이니 세는나이로 이제 28살이다. 이 나라에서 그 또래 중에서, 특히 혼자 머무는 또래 중에서, 그러한 생각을 해내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자신과 밀접한 타인들에 대한 평가나 대응 방식에서 기분 따위에서 벗어나 올바른 행동으로 그것을 바로잡거나 제대로 대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려나. 무슨 일이 있고 나서 홀로 되는 시간이면 ‘기분 나빠서’ 내지는 ‘기분 더러워서’ 소리부터 앞세우고, 씩씩거리면서 저기압을 증폭시켜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더 밀어 넣기에 더 잘 훈련된 이들이 내 눈엔 더 많이 띄던데... 내 눈이 문제이길 바라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 홀로이고 돌아갈 때도 혼자서 간다. 숙명적으로 혼자의 몸이다. 생사의 중간 여정인 생존 부분에서도 기본적으로는 혼자다. 혼자서 생존해야 하는 게 타고난 운명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마이클 월처의 말, ‘우리는 때로 행진도 하지만 더 많이는 혼자서 간다’라는 말도 그래서 공감대가 넓다.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그렇다.
그러므로 홀로 있을 때 제대로 생존 능력을 갖추는 것은 기본적인 책무다. 생존 능력에는 개인적 능력 갖추기가 기본 중의 기본에 들고, 그러한 개인 능력(personal abilities) 갖추기 항목에는 홀로 있음을 통한 자기 성찰과 자기 계도(啓導) 또한 필수적이다.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진정한 홀로 있음(genuine solitude)'이 드물다. 자발적으로 즐겁게 홀로 있음을 택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떠올려 보면서, 오늘과 내일의 삶을 곰곰 생각해 보는 일들이 드물다는 말이다.
이곳의 다른 잡문에서도 언급했지만(<고독감과 고독력(孤獨力)> http://blog.naver.com/jonychoi/20202968684), 진정한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그저 외로운 것은 고독감이고 자발적으로 홀로 있음을 택하는 것이 고독할 수 있는 힘, 곧 ‘고독력’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외롭다고 잘 투덜거리는 사람은 전문용어로 ‘군중 속에서의 고독감(crowded solitude)’을 부풀리는 사람이어서 생산성이 낮고 활력소 재생력에서도 바닥에 머물기 쉽지만, ‘고독력’을 기른 사람은 그와 정반대다. 높은 생산성과 넘치는 생력소를 자랑한다.
유현진의 그 촌스러운 웃음과 세련되지 못한 듯한 어눌한 화법 속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자기 성찰과 선택 기제, 그것은 '고독력'에서 배양된 것임에 틀림없다.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채 1년도 안 되게 홀로 머무는 기간에 그는 '진정한 홀로 있음(genuine solitude)' 과정을 자력으로 마스터해가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날 그 프로그램을 대하면서, 그가 유명 선수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멋진 삶을 엮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유현진. 한참이나 어린 후배지만, 그는 그날도 내게 스승이었다.
[June 2014] -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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