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호호 호오! : 사랑과 ‘포정해우(飽情解憂)’
북한어 부문을 정리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북한어인줄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 말들 중 대표적인
사례 몇 개를 골라 넣고 있는데 ‘신들메’ 생각이 났다. 야호(耶許)*!. ‘신들메’는 표준어인 ‘들메끈(신이 벗어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끈)’의 북한어다.
[참고] 감탄사 ‘야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르거나 외치는 소리’도 ‘야호’지만, ‘신이 나서 외치는 환호의 소리’를 뜻하는 ‘야호(耶許)’는 한자어다. 이때 쓰인 ‘호(許)’는 ‘이영차 호’.
이 ‘신들메’가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성경의 공이 지대하다.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새 번역 : 나는 그분의 신들메를 푸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신발을 조이는 신발 끈 외에,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또 다른 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신들메’를 신발 끈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고, 이 말이 북한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이들도 많긴 하지만.)
이 ‘신들메’가 성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최초 성경 번역(1887년. 이른바 ‘로스 번역’)에 참여한 이들이나 훗날 개신교와 가톨릭이 최초로 협력하여 발간한 《공동번역성서》(1971년 구약, 1977년 신약) 작업에 참여한 주역들 중의 상당수가 북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로스 번역의 주역이자 식자/인쇄까지도 도맡았던 서상륜 같은 분이 대표적이다. (참고 :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장로교-의 창립 멤버 14인 모두가 이북 출신 인사들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신들메’를 책자 제목의 일부로 ‘용감하게’ 채택한 유명 작가 한 사람이 생각났다. (여기서, ‘용감’이라는 말을 쓴 것은 비표준어를 제목으로 용감하게 사용한 것도 그렇지만, ‘신들메를 고쳐매며’라고 ‘고쳐 매며’라고 써야 할 어법까지도 용감하게 무시한 것을 포함하고자 함이다. 이 ‘고쳐 매며’는 '고치다'와 '매다'가 동격으로 쓰인 것으로 ‘매며’가 보조용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붙여 쓰기가 허용되지 않는 표현이고, 제목의 표기에서 ‘신들메를 고쳐 매며’로 올바로 적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그 작가는 ‘극우 또라이/꼴통 보수’로까지 몰리면서 이 나라에서 최초로 작품집 화형식까지 당한 처지라서 그 책자는 그의 독기 어린 울분과 불굴의 저항을 우회적으로 담아낸 ‘용감한’ 작품이기도 했다.)
그런 터라서 그 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까 뜬금없이, 뒤늦게 궁금해졌다. 궁금증이 스멀거리면 하던 일도 깜박한 채 그 즉시 뛰어드는 나인지라 (아침에만 해도 그날 북한어 부문 정리를 마치겠노라고 작심했던 터인데도 일을 팽개친 채), 검색 고우! 몇 개의 사이트를 훑다가 나는 그만 배꼽을 잡고 말았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 솜씨가 뛰어난 포정(백정)이 소의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으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를 비유하거나 기술의 묘(妙)를 칭찬할 때 비유하여 이르는 말)’라는 엄청나게 고상한 별명을 쓰시는 분이었는데, 그 대문간에 매단 표지판 앞에서 내가 그만 포복절도하고 만 것이다. 엄청난(?) 자호(自號)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세속적이었다.
표지판에는 왈, ‘欲情이 充足되면 옛 盟誓가 虛事로다.’ 한글 병기도 아닌 한자 표기로 자못 근엄(?)을 보태고 있었다. 볼수록 웃음이 나왔다. 자호(自號) 격인 ‘포정해우(庖丁解牛)’와 아우르면, 마치 이름은 하늘에 걸고 몸은 땅 위에서 노는 격.
그러다가 한참 뒤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함부로 매단 자호가 아닐 터라는 생각을 곱씹고 있으려니 이내 한문구 하나가 조립되었던 덕분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 ‘포정(庖丁)’은 소를 잡아 뼈와 살을 발라내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던 중국 고대의 요리인이고, ‘해우(解牛)’는 소를 잡아 뼈와 살을 발라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포정해우’라 하면 기술이 매우 뛰어남을 가리키는 말로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 나온다.
이 ‘포정해우’를 위 표지판의 뜻에 가깝게 다른 한자어로 억지를 조금 써보면 ‘포정해우(飽情解偶)’가 된다. 즉, 정(情)을 듬뿍 포식(飽)하고 나니 짝꿍(偶)도 잊혀지더라(解). 이걸 조금 더 선정적으로 번안하면 ‘지금 막 실컷 사랑받고 나니 늘 붙어 다니던 옛 친구나 머릿속에서 맴돌던 옛사랑, 심지어 파뿌리 짝꿍 따위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다.
선정적 번안 붓질을 마치고 나 혼자 흐뭇한 마음에 싱글거리고 났을 때다. 기억 한 조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꽤 오래 전 한용운 시인의 시 해설과 관련하여 대했던 글 한 편이었는데, 그걸 생각하자 표지판의 주인장에게 생각 없이 날렸던 웃음에 얼른 미안해하고 싶어졌다. 아니, 미안해해야 했다.
머쓱해진 내가 다른 저술 원고를 뒤적여 찾아낸 글의 내용은 이렇다.
욕정은 부재나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의 부정성―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이 '결여(manque)'라는 사실에 그 존재론적 근거를 갖는다. 욕정은 현존하지 않는 것, 부재 내지 무(無)를 유(有)로 설정한다. 그리고 부재가 존재로 채워질 때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기묘한 상관관계를 본다. 욕정과 부재는 그 존재론적 형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보 더 나아가 이 공유는 형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한용운에게는 존재의 기본 내용은 에로스이다. 그에게 사랑은 곧 그가 파악한 바의 정치적 형이상학적 진리의 움직임이며 진리는 곧 사랑의 움직임이다. '임의 침묵'에 있어서의 관능적인 내용이 그대로 관능적인 호소력을 가지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의미를 암시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한용운의 세계 이해, 그것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서
여기서 핵심 구절은 ‘욕정은 현존하지 않는 것, 부재 내지 무(無)를 유(有)로 설정한다. 그리고 부재가 존재로 채워질 때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기묘한 상관관계를 본다. 욕정과 부재는 그 존재론적 형식을 공유한다.’라는 부분이다.
쉽게 말해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중략]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 표현은 님의 부재(욕정)가 현물화되었을 때(부재가 존재로 충족될 때) 도리어 욕정이 사라지면서 옛 맹서도 실물로 사라진다는 뜻이다. ‘欲情이 充足되면 옛 盟誓가 虛事로다.’라는 표지판은 그것을 압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들메’ 낱말에 끌려 잠시 돌고 온 ‘신들메 산책길’에서 큰 깨우침을 얻은 셈이었다. 망외의 소득치고는 대박. 눈에 보이는 것들 앞에서, 혹은 눈앞을 잠시 스쳐간 것들 앞에서, 내가 그것들의 내용물에까지, 성급하고도 단정적으로 그리고 얇고 얕게, 연역법으로 재단한 적이 그 얼마나 많았을까(혹은 기억도 못할 정도로, 많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자, 새삼 얼굴이 화끈거려 왔다.
그리고, 그것은 ‘포정해우(庖丁解牛)’와 더불어 멋진 표지판까지 대하게 해준 분의 선물만 같기도 했다. 그것도 대박 선물. 선물을 받으면 답례가 있어야 하는 법이고, 답례는 후학답게 배움을 즉시 써먹는 게 제 격이 아니던가. 배운 말로 답례를 하자면 이렇다.
저는 欲情이 充足되더라도 옛 盟誓를 지키겠습니다. 저는 사랑 없이는 못 삽니다. 제게 '포정해우'란 정을 듬뿍 받으면 모든 걱정 근심이 죄 사라지는 '飽情解憂'거든요. [Aug. 2014]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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