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오기]
머리 남자와 다리 여자의 그림
최 종 희
1. 머리 남자
재미화가로 우리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이 중에는 문범강이라는 사람이 있다. 천경자 화백의 사위라고 하면 더 빨리들 알아듣는다. 정작 당사자는 그러한 관계로 소개되는 순간 자신이 괄호속의 인물로 밀리는 것 같아서 아주 싫어하는 데도, 그를 알아보게 하는 데는 여전히 그 방법이 가장 빠르다.
그는 누구 딸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가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그 동안 전공해오던 판화를 때려치우고 회화 쪽으로 전환할 때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천경자 사위인 판화가 아무개>로 소개되는 게 싫어서였다고 했다. 판화 분야가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없는 것은 여전했을 시절에 판화를 전공했으니, 사람들이 말끝마다 그를 누구의 사위라고 소개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지금의 그는 미국의 대학(조지타운대)에서 회화과의 주임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쌓았다. 우리나라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서강대) 도미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한지 8년만에 그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미국내의 유수한 화랑들이 앞 다투어 초대전을 갖고 싶어하는 알아주는 화가의 대열에 끼어있다.
그는 참으로 열심히 창작에 몰두해온 사람이고 지금도 그렇다. 창고 같은 단층 건물의 넓지 않은 그의 화실에 하루 20시간 이상을 머물 때가 잦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에 매달린다. 그의 성공은 그러한 치열한 창작 태도에 기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최근 발표한 작품들에는 특징이 있다. 인물화이기는 한데, 대상이 되는 인물의 머리가 가슴으로 내려와 있거나 하늘로 떠올라 있을 정도로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다.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얼굴이 몸통 위에 제대로 얌전히 놓인 것만을 대해오던 우리에게는 무척 괴이하거나 특이하게 느껴진다.
얼굴이 전면을 향하고 있는 커다란 머리통을 명치 근방에서 두 손으로 받아 안고 있는 그림에는 <주시하다/자아 Watch/Self>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마치, 호리병을 빠져나온 마술사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다. 그처럼 머리가 몸통 위의 제 자리에 놓여있지 않은 형상은 그의 그림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처럼 분리된 얼굴들의 입은 하나 같이 벌어져 있다.
그러한 그의 그림은 일견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표정들이 살아 있고, 따뜻하거나 진지해 보인다. 뭔가를 잔뜩 말하고 싶어하지만, 일순 정지하고 있는 듯하다. 몸통 위에 제대로 붙어있는 얼굴이라면 다 표현해 낼 수 없는 섬세한 표정들이 커다랗게 확대된 얼굴 위에는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처럼 확대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얼굴에서 가장 살아 있는 부분은 시선이다. 정면이든 측면이든 작중 인물이 향하고 있는 곳에서 되쏘아져 온 어떤 느낌들까지도 그 시선에서 읽어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형태적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포근한 느낌을 준다. 잔잔한 말투로 우리에게 귓속말을 전해오는 듯하다. 그것도 아주 깊은 의미를 함축한 어떤 말마디들을 몇 개만 늘어놓는 식으로. 삶에서 포착한 어떤 고뇌를 작중 화자가 일단 흡수한 뒤 그것을 순화시켜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듯하다. 그의 그림이 주는 복사열은 그래서 참으로 따뜻하다. 그리고 그러한 따뜻함의 발원지는 앞서 언급했던 그림 속의 시선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려면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 예를 들면 몸통과 팔 다리 같은 것은 구도(構圖)의 틀을 짜는 데에만, 즉 배치의 기본형태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표정을 담고 있는 얼굴 부분, 그 중에서도 시선이라는 걸 그의 그림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나아가, 세상을 향한 시선이야말로 오관과 지각을 거쳐 정련(精練)되고 성찰을 거친 끝에 다듬어진 가장 섬세하고도 치밀한 집적회로라는 점을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넌지시, 그러나 한편으로는 옹골차게 알려주고 있다. 즉,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피드백이 우리의 시선에 응결될 수 있음을 슬며시 깨닫는다.
머리를 마음대로 떼였다 붙였다 하는 남자. 머리통만을 확대해서 인생살이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하는 화가 문범강. 그는 오늘도 그 자신의 머리통을 두드리며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을 꺼내어 세상을 향해 늘어놓기에 바쁘다. 머리통을 분리하는 일은 곧 목이 떨어지는 것이므로 머리를 떼어내면 그 순간 생각 자체가 멈춰지곤 하던 우리의 기존 관념을, 그의 그림은 섬뜩하게 박살낸다. 기존 형식을 뛰어 넘는 그의 행태는 강렬하고 놀랍지만 그러한 파괴를 통하여 보여주는 그의 발칙한 상상력의 세상은 의외로 한없이 따사롭다.
형식의 파괴와 외형의 무시가 내면의 실존까지도 박탈하는 것으로 지레 겁을 먹고 지내는 우리에게 그는 그의 자그만 몸의 몇 배 크기로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내쏜다. 그는 미리 녹슨 채 완강히 제 자리만 고집하는 우리의 낡은 머리를 대체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진짜 머리다. 머리만 떼어놔도 그 머리가 싱싱하게 살아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머리 남자.
특히, 라캉이 그의 응시이론(the theory of gaze)에서 언급했듯이, ‘당신은 결코 내가 당신을 보는 곳에서 나를 볼 수 없다. (You never look at me from the place from which I see you.)’는 걸, 그는 실물로 제시함으로써, 주체가 타자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우리의 근원적 소망을, 긴 말 필요없이 대뜸, 실현해낸 멋진 철학가이기도 하다. (하기야 그는 '한마음禪院' 워싱턴 支院의 신도회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마음의 깊이를 깊이 천착하는 작가이다.)
2. 다리 여자
요즘 서울의 어느 화랑에서 재미화가 한 사람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김원숙이다. 그녀 역시 그녀의 이름만으로 생소하다면, 북한의 기아 돕기로 유명한 유진벨 재단을 이끌고 있는 미국인 남자 스티브 린튼이 그녀의 남편이라고 하면 빨리 알아들을지 모르겠다.
(김원숙 - 1953년생, 스티브 린튼 - 1950년생)
스티브는 오래 전부터 간간이 신문지상에도 소개된 사람이지만, 특히 작년말과 금년초에 걸쳐서 티비 방송국의 북한 동행 취재로 그의 선행이 널리 알려지게 된 사람이다. 봉사가 몸에 밴 이들의 표정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착함의 표지, 곧 은은한 미소가 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특히, 그의 집안은 5대째 한국에 머물고 있고, 동생인 데이빗 린튼 (변호사)은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말을 잘하는 변호사로 유명하다.
여하간, 그녀가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 중에는 허벅지의 중간쯤에서 걷어올려진 하얀 치마 아래로 뽀얀 종아리를 드러낸 채 뒤돌아 서 있는 여인의 그림이 있다. 맨발인 그녀의 허리는 그 위에 느닷없이 펼쳐진 연못으로 잘려 있고, 그 연못 앞쪽으로 하얀 고니 두 마리가 떠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먼 곳에 머리만 겨우 내놓고 있는 섬 하나도 그림의 일부다. <생을 위하여 For Life>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글 속에 나오는 작품이 전시 후 판매되었는지, 김원숙의 홈페이지에도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비슷한 작품 'Walk on Water'를 대신 싣는다.>
헌데 여인의 치마가 묘하다. 뒤에서는 허벅지까지 보이지만 앞쪽으로는 바닥에까지 끌리고 있어서 나도 처음에는 웨딩드레스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치마가 아니라 목욕 후에 두르고 나오는 대형 타월이다. 아하, 그러면 연못 아래로 늘어뜨려진 긴 풀 같은 게 바로 여인의 머리칼이로구나. 그림은 목욕을 마친 여인의 편안한 심사를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가슴속에 든 채 찰랑이는 연못과 순백의 고니, 그리고 수평선에 가물거리는 조그만 섬 하나가 그것이다. 희망 같기도 하고, 과거의 회억(回憶)일 듯도 싶다. 이것들이 그림 속에서 여인의 허리를 자르고 있다.
그 바람에 허리 아래로 잘린 다리만 보이는 여인의 그림인데도 기괴한 분위기가 한 조각도 감돌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이들의 가슴이 잔잔해지고, 그림 속에 배어 있는 편안함을 그림 밖에서도 함께 나누게 된다.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곱고 담백한 마음씨 덕분이다. 마치 한 편의 동화를 그림 속에 녹여 놓은 듯이 맑고 소박하다.
화가 김원숙은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미국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될 정도로 원숙한 작가다. 그런데도 그녀의 그림은 마치 어린 아이들의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앳된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하기야, 작가 자신의 얼굴도 얼마 전까지 무척 앳되어 보였다. 햇감자처럼 뽀얗고 동글동글해서 좀처럼 연치를 제대로 짚어낼 수가 없을 정도로. 현대 미술로 내려올수록 어떤 작품들은 화가가 혼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옹알이로 화면을 가득 채운 것들도 많은데, 그러한 작품들과 김원숙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다. 무대 의상을 걸치고 화장까지 한 성인 배우의 독백과 발가벗은 산골 어린이의 미소 만큼이라고 하면 그 차이를 지나치게 과장한 셈이 될까.
뒷모습을 보이고 선 여인의 다리를 통해서 삶의 희망을 곱고 맑게 그려내는 화가 김원숙은 다리 한 가지만으로도 조용조용 인생을 관조해내는 달인이다. 솔직하고 담백한 붓질로 삶과 꿈을, 인생의 이면과 전면을,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다리(橋)를 여인의 다리(脚) 하나에 담아내고 있다. 붓을 잡고 있는 손길의 따스함까지도 맨발 여인의 다리에서 느껴질 정도로 포근하다. 나는 그녀에게 다리 여자라는 이름표를 붙이며 그 포근함을 껴안고 그림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3. 머리 남자와 다리 여자
동체에서 분리된 머리와 허리 아래의 다리뿐인 여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기괴함만을 연상시킬 그러한 그림들이 의외로 따뜻한 삶의 온기를 전해온다. 그것은 그린 이의 가슴속에 담겨진 마음들이 그대로 읽혀지기 때문일 것이다. 호들갑스럽거나 근엄한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낼 듯한 두 사람의 행보가 그림 밖에서도 읽혀진다.
범상치 않은 강렬한 붓질의 소유자 문범강이 내쏘는 날카로운 인생 읽기의 시선 끝에서 맛보는 온돌 같은 따끈함. 그리고, 작법으로만 보자면 어린아이의 그것으로도 보일 만치 소박한 붓질에 숨겨져 있는 김원숙의 내재적인 원숙미. 그것들이 어울려 두 사람의 그림 세계에 쌈박한 신산미(辛酸美)와 숭늉 같은 인간미를 용융시키고 있다.
나는 장난삼아 두 그림을 연결시켜 본다. 머리 남자와 다리 여자의 접합, 곧 다리뿐인 여자의 몸통 위에 가슴으로 내려온 남자의 머리 부분을 올려놓는 것이다. 희한하다. 크기와 색상의 차이가 있어서 완벽한 세트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김원숙의 여자 위에 올라가 있는 문범강의 남자 표정이 좀 기묘해서 그렇지, 그런 대로 봐줄 만은 하다.
문득,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묶이고 있음을 본다. 밖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편차를 건너뛰어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기. 생각해 보면 그것은 두 사람을 관통하고 있는 세상 읽기의 시선 덕분이다.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비록 서로 다른 곳들을 쳐다보고 있어도 마음의 필름에 찍히는 그림들은 비슷한 느낌으로 인화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 남자와 다리 여자. 괴기 영화의 소품으로나 쓰일 그러한 소재들을 가지고 짜릿하게 아름다운 세상의 신화 엮기에 매달려 있는 문범강과 김원숙. 감동적인 아름다움의 진짜 속성은 따뜻함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두 사람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세상 독법(讀法)에 즐겁게 전율하고 싶다. [25/05/2000]
[옮겨오면서] 1. 김원숙의 작품 두 점을 아래에 덧붙인다. 이어령 교수는 그녀의
작품을 두고, 우리말에서 <그림>과 <글>,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낱말은 한 뿌리인 그리다(=쓰다)에서 나온 것인데, 김원숙의 그림
이야말로 그 본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모필로 쓴 그림이라 했다.
<Thirst I> <Shadow Window>
2. 아래의 문범강 교수 작품들은 이른바 '순자시리즈'로서, 2008년
메릴랜드주의 예술상을 수상한 것들이다.
제목은 각각 영자, 순자, 옥자이다.
문교수의 전시회는 한국에서 두 번 열렸는데, 그때마다 그의 얼굴
표정도 날카로움이 덜어지고 점점 따뜻해져 가는 듯하다. 내가
그렇게 보아서 그런가...
오른쪽 사진이 2008년 두 번째 전시회때의 모습. [Sep.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