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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급 광개토대왕능비 탁본 미공개작 공개 : 파주 북소리

[촌놈살이 逸誌]

by 지구촌사람 2014. 10. 9.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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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급(?) 광개토대왕능비 초기 탁본 미공개작 공개 : 파주 북소리

 

 

요즘 파주 출판단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파주 북소리>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이 100여 개가 넘고

행사장은 파주 출판도시 전역에 걸쳐 있다.

 

모두 다 볼거리, 익힐 거리, 읽을 거리들로 모자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특별히 권하고 싶은 게 있다.

<7인 7색의 고서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도서 애장가들의 특별전이 그것이다.

 

소개하고 싶은 것들은 엄청 많다.

가로 1미터 세로 1.5미터가 넘고 무게가 60킬로그램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책으로 등재된 <부탄>이나

가로 세로가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아 세계 최소 책으로 등재된 <四季의 草>도 있고

이 나라에서 최초로 창간된 어린이 관련 도서도 적지 않으며

보물급 고서(한서)들도 적지 않다.

 

그런 것들을 실물로 대할 수 있다.​

도서명으로만 대하던 것들을 실물로 대하면 ​어떤 감흥이 이는지

필설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중에서도 전시장(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 지혜의 숲1 좌측 특별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 중앙의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늘어뜨려진 대형 탁본 4점이 눈에 띄는데

그게 바로 제목에 사용된 <광대토대왕능비> 초기 탁본이다.

범우사 회장 윤형두 님의 애장품 중 하나로 아직까지 공개한 적이 없던 것.

크기만으로도 우리를 압도하고 남는다.

 

대왕의 능비는 탁본의 종류에서부터 (언제 만들어진 탁본인지가 중요)

그 내용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온갖 설이 있다.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내용 일부를 감추거나, 그 부분을 위작으로 처리했다고도 하고,

탁본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려고 불을 피우는 바람에

글자가 훼손되거나 탈락된 것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시작은 소장자의 말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석회도부설이 제기되기 이전

그러니까, 청나라 말기 탁본 조치가 가능해지면서 만들어진 초기작으로

위작설과 무관한 진본(珍)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이 능비 탁본이 좀 있지만, 이처럼 확실한 변개 전의 초기 탁본은

매우 드문 것으로 안다. 그래서 감히 '보물급'이라는 말을 써 봤다.

<전시된 탁본 4점 중의 하나. 일본인의 조작설로 뜨거워진 문제의 구절,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 보인다.

(왼쪽에서 세 번째 줄 위에서 6번째 글자부터가 그 부분이다)

능비 높이가 6.4미터여서 탁본 크기 또한 세로 크기가 6.4미터에 이른다.

전시장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

위의 사진은 전시 안내장에 수록된 작품 사진이다.>

 

다른 전시작들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소중한 것들이 많다.

우리나라 도서 외에 외국 것들도 적지 않아서,

우리의 의식 지평을 넓히는 데에도 아주 좋다.

 

예컨대, 한길사 대표이자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애쓰고 계신

김언호 님의 출품작 중에는 영국 화가 터너의 판화집도 있고

그 밖에 어린이 그림책의 대가 칼데콧의 작품들도 대할 수 있다.

 

행사는 10월 12일까지 계속된다.

짬을 내어 둘러볼 만한 값진 전시로 추천하고 싶다.

전시장은 파주 출판단지로 들어서서 조금 오다 보면 우측에 있는

다산교를 건너 200여 미터 오면 있다.

휴일/주말에는 차들이 너무 많아서 주차는 물론 주행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

대중교통(주로 합정동과 영등포에서 출발하는 직행편) 이용을 추천하고 싶다.  [Oct. 2014] - 溫草

 

 

*아래 자료는 두산백과에서 설명하는 능비 관련 내용.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11~ 6)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17~ 38)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1,400개의 촌()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38~ 49)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연구와 논쟁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쌍구(雙鉤) : 1.글씨를 베낄 때, 가는 선으로 글자의 윤곽을 그려 내는 법.

                      2.글씨를 새길 때, 글자의 윤곽을 따라 가늘게 줄을 그어 표시하는 법.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1883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 '來渡海破''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큰 중국에서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 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 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출처 : 두산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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