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와 ‘한문’, 그리고 ‘한자어’와 ‘우리말’
[문] 우리말 공부를 하는 데에 한자 공부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한자는 남의 나라 글자이잖습니까. 우리말을 공부하는 데에 굳이 남의 나라 글자인 한자까지 익히라는 것은 심하게 말해서 어불성설이 아닌가요?
[답] 미안하지만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아니함)이 아니라, 말이 되는 얘기랍니다. 그 전에 먼저, ‘한자(漢字)’와 ‘한문(漢文)’ 그리고 ‘한자어(漢字語)’가 각각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죠.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만들어 오늘날에도 쓰고 있는 ‘문자’를 말하는데, 일종의 표기 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사용하는 국가마다 조금씩 서체가 다를 수도 있지요. 오늘날 중국에서는 ‘지안지’(简字)체를 사용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일본식 약자체인 ‘신자체(新字体)’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나름으로 만든 약자를 포함한 통용 한자*를 사용 중이고요.
[참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 :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쓰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글자인 ‘乭(돌)·乧(둘)·串(곶)·畓(답)·䢏(두)·垈(대)·洑(보)·(䢘)(수)……’ 등도 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국산(?) 한자는 다른 나라에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바둑 선수 ‘이세돌’의 우리식 표기는 李世乭이지만, 중국에서는 선수 명단에 李世石으로 표기한다. ‘乭’이라는 한자가 중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한문(漢文)’이란 ‘한자(漢字)만으로 쓰인 문장이나 문학’을 뜻합니다. 즉, 한글이 전혀 쓰이지 않는다는 점과 낱말이 아닌 문장(글)을 뜻한다는 점이 특징이지요.
한편 우리말에서의 ‘한자어(漢字語)’란 이러한 ‘한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말’인데, 그 표기는 한글로 하고 필요할 경우에만 괄호 안에 우리나라 식의 한자를 사용하여 한자 표기를 덧붙입니다(한자 병기). 즉,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한자어는 한글로 표기되므로(필요할 경우에 한자를 부기) 한자로만 표기되는 한문과는 다르고, 우리말에 속한답니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자칫 한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이죠. 그런 실수들이 잦은데,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
1. 한글 전용, 국한병용(國漢竝用), 국한자혼용(國漢字混用) : 한글 전용이란 한자어를 포함한 모든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자는 것으로 괄호 안의 한자 병기도 없애자는 것이고, 국한병용(國漢竝用)/국한병기(國漢倂記)는 한자어를 한글로 적되 필요할 경우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 그리고, 국한자혼용(國漢字混用)은 필요할 경우 한자어를 한글 표기 없이 한자로도 적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國漢字混用은 漢字語를 한글 表記 없이 漢字로도 적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의 경우가 국한자혼용(國漢字混用)에 해당된다. 이 책의 표기 방식이 국한병용/병기(國漢竝用/倂記)이다.
2. 우리말(표준어)에 포함되는 말 : 우리말에는 이러한 한자어와 고유어(토박이말/순우리말) 외에도 외래어, 속어 등도 포함된다.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앞서 다룬 ‘우리말’과 ‘순우리말’은 같은 말이 아니다 항목 참조.
한자어와 한문의 차이와 관련하여 좀 더 말씀드릴게요. 우리나라의 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 중에도 제목이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시죠? 김소월의 ‘산유화(山有花)’가 바로 그것이랍니다.
한문으로 ‘산에 꽃이 있다.’를 표기하면 두 가지가 됩니다. ‘화재산(花在山)’과 ‘산유화(山有花)’가 그것이죠. ‘山有花’에서 주어가 뒤에 있는 것은 한문에서 동사 ‘있다’의 뜻을 나타내는 ‘有’는 어법상 주어가 도치되게 마련이어서 부사어구가 주어 앞에 놓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현대 중국어에서도 마찬가지랍니다. 이를테면 ‘책상 위에 사전 한 권이 있다’라고 한문으로 적으면 ‘탁자상유일본사전(桌子上有一本词典)’이 되는데 부사구 ‘책상 위(桌子上)’가 주어의 앞에 놓입니다. 반면, 동사를 ‘有’ 대신 ‘在’를 사용하면 주어가 도치되지 않아서 ‘花在山’이 되는 것이고요.
따라서 ‘산유화’는 산에 있는 꽃, 즉 ‘산꽃(≒山花)’을 뜻하는 한자어가 아니라 시의 첫 구이기도 한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를 한문으로 요약(?)한 제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유화’라는 꽃 이름이 우리말에는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산꽃’을 뜻하는 말도 아니랍니다. ‘산꽃’을 뜻하는 한자어로는 ‘산화(山花)’만 있죠. 다만 ‘산유화’는 ‘메나리(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 전해 오는 농부가의 하나)’와는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데, 이 또한 소월의 시 제목처럼 고유명사일 뿐입니다. 참고로, ‘산꽃≒산화(山花)’ 외에 ‘들꽃’을 이르는 한자어로는 ‘야화(野花)’가 있는데, ‘야화’는 하층 사회나 화류계 미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죠.
한자어와 한문의 차이를 확실하게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셨는지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율*이나 비중은 절대적이어서, 이러한 한자어들을 익히는 데서 한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크다. 한자를 모르고는 정확한 뜻풀이는커녕 우리말 공부를 하는 데에서조차 지장이 많다. 심지어 소경이 문고리 잡듯 해야 할 때도 많다고 비유하는 이도 있다.
[참고] 한자어 비율과 한글 전용 :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율이나 비중 문제가 나오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한글 전용과의 대립각에서 비롯된 또 다른 관점이다. 즉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우리말에서 한자어 비율이 높긴 하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비율은 고유어 54%, 한자어 35%, 외래어 2%(국립국어연구원,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 2002년)라는 수치를 인용하곤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 수와 언어 교육의 기본 정책이랄 수 있는 어문정책을 직결시키는 것은 좁은 생각이다. 일례로 영어 어휘는 400만 개가 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1000~2000단어만 사용해도 살아가는 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개개인이 사용하거나 사용 가능한 낱말의 수효에 따라 빈부, 교육수준, 지적 능력, 문화지수, 창의성 등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그 좋은 예로, 미국 정부가 소득 최하위 계층에게 속칭 ‘식권(Food Stamp)’이라고 하는 사회복지 쿠폰(1불/5불/10불짜리의 세 가지로 매월 평균 133불 정도. 한화로 약 15만 원)을 지급하는데(2013년 말 기준 대상자는 4760만 명. 764억불 규모. 한화 약 84조 원), 수혜자의 절반 이상이 그 식권을 받으면서 서명하는 문서에 사용된 ‘(식권의 상업적 매매는) 금지된다(prohibited)’라는 낱말 뜻과 철자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 : 총괄 부서인 미 농무부 산하 SNAP(영양보충지원계획)].
한자어와 한글 전용과의 대립/대치 문제는 다음 항에서 간단하게나마 좀 더 다루기로 한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공부할 때 무조건 낱말을 암기하려 들기보다는 한자를 익히거나 관련 한자를 떠올려 보는 것이 요긴할 때가 많다. 그 낱말에 쓰이는 한자를 정확히 알고 있거나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올바른 낱말을 고를 수 있거나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어가 아닌 우리 식의) 한자를 익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손쉬운 예로, ‘성대묘사’는 ‘성대모사’의 잘못인데, ‘모사(模寫)’는 ‘사물을 형체 그대로 그리거나 본을 떠서 똑같이 그림. 또는 원본을 베끼는 것’이고, ‘묘사(描寫)’는 ‘어떤 대상을 언어나 그림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소리로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흉내 내는 것은 ‘묘사’가 아니라 ‘모사’여야 한다는 걸 한자 뜻풀이를 통하면 비교적 손쉽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한자를 익힐 필요가 있다.
나아가, ‘모사(模寫)’에 사용된 한자 ‘模’가 베끼거나 본뜨거나 흉내 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 다음과 같은 수많은 관련어들의 익힘이나 추론과 활용, 나아가 전문어의 신어 조어에서도 매우 편리해진다는 이점이 있다.
모형(模型/模形) : 실물을 모방하여 만든 물건. =>모형도(模型圖)/모형판(模型板)/모형기(模型機)/모형선(模型船)/모형화(模型化)/모형실험(模型實驗)≒모의실험/모형시험조(模型試驗槽)/모형무대(模型舞臺)/모형계기분석(模型繼起分析)≒인과순환분석(因果循環分析)
모범(模範) : 본받아 배울 만한 대상. =>모범생/모범수(模範囚)/모범적(模範的)/모범림(模範林)/모범촌(模範村)/모범상(模範賞)/모범택시(模範taxi)/모범학교(模範學校)
모방(模倣) :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음. =>모방자(模倣者)/모방작(模倣作)/모방설(模倣說)/모방색(模倣色)/모방주의/모방예술/모방유희(模倣遊戱)
모의(模擬) : 실제의 것을 흉내 내어 그대로 해 봄. 또는 그런 일. =>모의점(模擬店)/모의총(模擬銃)/모의탄(模擬彈)/모의전(模擬戰)/모의고사(模擬考査)≒모의시험(模擬試驗)/모의실험(模擬實驗)/모의국회(模擬國會)/모의재판(模擬裁判)/모의수업(模擬授業)/모의송전선(模擬送電線)
모작(模作)≒모제(模製/摸製) : 남의 작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듦. 또는 그 작품.
모창(模唱) : 남의 노래를 흉내 내는 일.
모조(模造) :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본떠서 만듦. 또는 그런 것. =>모조품(模造品)/모조석(模造石)≒인조석(人造石)/모조지(模造紙)/모조금(模造金)/모조백금(模造白金)/모조진주(模造眞珠)
모각(模刻) : 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새김. =>모각본(模刻本)
모상(模像) : 모방하여 만든 상.
모법(模法) : 방법을 본뜸.
[위의 글은 근간 예정인 가제 <우리말 힘이 밥심보다 낫다 - 익혀서 남도 주자> 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재미로 읽는 글 : 낱말 안에서 글자의 순서 (0) | 2015.02.14 |
---|---|
우리말은 소리 나는 대로 써도 되는 것 아닌가 : ‘한글 전용’과 ‘한자 병기’, 그리고 ‘풀어쓰기’와 ‘모아쓰기’ (0) | 2015.02.12 |
표준어(13개) 신규 추가 확정 내용 (0) | 2014.12.16 |
2014년 <표준국어대사전> 내용 수정에 따른 책자 내용 수정분 (0) | 2014.12.14 |
문장부호 개정(2015.1.1.부터 시행)에 따른 현장 학습(1) (0) | 2014.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