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내가 한 짓(3)
-아 불쌍한 내 왼손이어! 이런 사람들도 있다
설 연휴 직전 울 집 거실에 이상한(?) 카톤 박스가 세 개 왔다.
택배인가 하고 살펴보니 아니다.
겉에는 대기업의 상표가 찍혀 있고, 들어보니 무게는 의외로 가볍다.
궁금해하는 내게 아내가 결론부터 꺼내든다.
그게 우리가 설 연휴 중에 반드시 해내야 할 과업이란다.
그러면서 자초지종을 잇댔다.
00엄마가 있다.
아내와 더불어 온갖 바깥 행사에 함께하는, 씩씩한 중년.
매주 2회 독서 지도를 두 학교에서 하고,
장애인학교에도 같이 나가고, 격주로 음악 재능기부를 하는
동아리에도 고정 멤버다. (그녀의 딸은 올해 예고로 진학했다.)
또 다른 두 개의 야간 공부 동아리 활동에서도 대장 노릇을 한다.
그런 이가 하는 가정 부업 중 하나란다.
그녀는 우리 집의 두 계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곳에
월정액 자동 이체 기부를 하고 있는데
그걸 이 가정 부업을 통해 마련한단다.
그녀의 남편은 대기업의 부장이지만
그가 애써서 벌어다주는 돈에는 한 푼도 손을 안 대기 위해.
그런데 이번에 맡은 것은(매번 작업 아이템이 바뀐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 연휴의 마지막까지 일을 끝내야
그 다음날로 연기된 납품 기한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꼭 해내야 하는 일인데,
워낙 수량이 많아서 몇 집으로 나누어 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부탁해 오길래
식구 수대로 세 상자만 받았단다.
*
아내의 설명에 나는 찍소리도 못했다.
아니, 내가 몰랐던 그녀의 속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고 또 놀랐다.
그 뒤로 설날 하루를 빼고는
(아니, 설날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엔 작업했다.)
그 과업(?)에 매진했다. 내게도 한 상자가 배당된 까닭에.
바로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이 그것.
1회용 의료용품으로 산소호흡기 등을 착용하거나 할 때
코를 고정시키는 집게라는데, 작업 내용은 코에 닿는 부분의 양쪽에
동그란 스펀지 하나씩을 부착하는 일.
기계 작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사람 손으로 해야 한단다.
손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작업 단계는 꽤 복잡.
우선 상자 속에 섞여 있는 것들을 꺼내어
작업대 위에 쏟아놓고 두 가지 타입(손잡이의 주름 유무)을 구분하면서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것들은 작업하기 좋게 분리.
그리고 스펀지 스티커가 붙어 있는 부분을 작업하기 좋게 잘 접기.
이어서 하나씩 떼어 붙이는데
그때마다 왼손으로는 집게를 잡고 벌려 주어야만 한다.
오른손이 들어가 작업하기 좋도록.
맨 처음엔 하나를 끝내는데, 스펀지를 붙이는 작업에만 10초 이상 걸렸다.
붙여지지 않은 부분과 1밀리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날 정도로
정확하게 부착해야 하는 작업이라서.
첫 한 시간엔 100개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손에 익자 한 시간에 150개 정도를 해낼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첫날 4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는
아이고 무릎이야 소리는 기본으로 나왔고
자고 나니 매번 집게를 눌러 벌린 왼손 엄지와 검지가 부어 있었다.
*
결과... 연휴 4일 동안 틈틈이 죽어라 했다.
우리 때문에, 우리 집은 나 때문에, 납품 시한을 지키지 못해서는 안 되기에.
드디어 내 몫이 끝나자 우리 집 몫도 끝났다.
한 상자에 몇 개나 들었는지 난 잘 모른다.
대충 짐작하기에 (작업 능률을 역산해 볼 때) 3500개~4000개 정도가
들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면 그 4일 동안 내가 열 댓 시간을 죽어라 한 일이
벌이로 치면 7만 ~8만 원쯤 된다. 개당 20원씩이라고 하니까.
6천 원대의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도 10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 알바 시급도 못되는 일을 한 셈이다.
그 뒤 한 해 네 번 정도는 보는 친구와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다.
여느 때 같으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집의 고정 메뉴인
한식 정식 2만 원짜리를 시켰을 텐데
그날은 내가 우겨서 점심 정식 11000원짜리를 시켰다.
그런 작업을 한 후에, 한 병에 1100원인 막걸리를 사러 나가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그 1100원을 벌려면 그 손 아픈 집게 작업을
55개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았던 기억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가지는 당분간 잊지 않을 듯하다.
<굿네이버>나 <유니세프> 등에 월정액 2~3만 원씩의 기부를 하고 있는 이들은
부자라서 하는 게 아니라, 몸수고를 아끼지 않고라도 해내려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라는 것과
단돈 천 원이랄지라도 그 액수의 뒤꼍에는
몸 아픈 고통, 뼈가 시리는 아픔들도 담겨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Feb. 2016]
-溫草
술친구 (0) | 2016.03.18 |
---|---|
분노의 격랑도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밤잔물이 된다 (0) | 2016.02.28 |
남자 한식 조리사와 코미디언의 공통점 (0) | 2016.02.18 |
함박눈과 환상 속의 그녀 (0) | 2016.02.16 |
미인은 착하다 (0) | 2016.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