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격랑도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밤잔물이 된다
어제 오전 책 하나를 받았다. 내 저서 중 하나의 개정판.
지난 1월 네 차례에 걸친 교정 작업에 보름 이상을 바친 책.
다른 원고 작업 시간에 쪼들리고 있을 때였지만,
그 교정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없는 책자였다.
반갑게 받아든 책을 살펴보다가... 시쳇말로 ‘머리 뚜껑’이 열렸다.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이 보여서다.
가나다순으로 편제된 것이어서 찾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책의 오른쪽 옆면에 그 색인 표지를 넣었는데
그게 전혀 구분이 안 되게 한 줄짜리 수평선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
그뿐이 아니라, 본문과 부록 사이에 간지 한 장 들어가 있지 않았다.
속표지에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그처럼 느닷없이 시커먼 색깔의 내용물을 조금은 덜 거북스럽게도
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머리말 부분의 행간 간격도, 강조 활자 사용분도
죄다 맘에 들지 않고...
책을 대하는 독자들은 책 대신 저자를 욕한다.
발간 책자 모두를 회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출판사 직원들에게 전화했다.
퍼부었다.
저녁 때... 집사람에게 책을 보여 주었다.
한참 뒤, 답이 왔다.
- 어쩌겠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문제 삼으면 직원들도 다칠 거고.
게다가 내용상의 문제가 아니고,
어찌 보면 꾸밈과 마무리상의 문제일 뿐인데...
하룻밤이 지났다.
늘 그렇듯이 새벽에 눈을 뜨고, 일 시작 전,
1층 쉼터로 내려가 담배 한 대를 피워물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거쳐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여명과는 한 뼘쯤의 거리를 두고 있는 하늘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옆으로 훑었다.
하늘은 넓었다.
온 하늘을 훑으려니 내가 몸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기둥 사이에 일부 하늘이 가려졌다.
쉼터를 벗어나 정문 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하늘을 훑었을 때야 비로소
온 하늘이 내게 안겨 왔다.
아침이 되었을 때 어제 내가 괴롭힌 출판사 직원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분노의 격랑도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밤잔물*이 된다.
이게 오늘의 내 심정. 어젠 미안했네...”로 시작되는 문자를. [Feb. 2016]
-溫草
*밤잔물 : ≒밤잔숭늉. ‘밤을 지낸 자리끼’를 뜻한다.
증세를 탄원한 뉴욕의 억만장자들 (0) | 2016.03.24 |
---|---|
술친구 (0) | 2016.03.18 |
설 연휴에 내가 한 짓들(3) : 아 불쌍한 내 왼손이어! 이런 사람들도 있다 (0) | 2016.02.21 |
남자 한식 조리사와 코미디언의 공통점 (0) | 2016.02.18 |
함박눈과 환상 속의 그녀 (0) | 2016.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