띨띨이 대취하다
지난 월요일, 집 근처의 도서관 휴관으로 교하도서관으로 갔다.
점심 전, 전화가 왔다.
오매. 이게 누구여?
어쩌다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면 소리샘 어쩌고가 답이고
그런 소리가 두 번 들릴 때까지도 답이 없는 친구.
부재중 전화 표지가 떠오르련만 답도 없는 친구.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식당 주소 좀 찍어 보내라 했더니만
한 달 반 만에 답이 오는 친구.
그렇다고 천릿길이나 떨어져 있는 건 아니다.
파주로 옮겨 오자마자 여섯 해 전 장모님을 모시고 갔다가
약간 쉰내가 나는 듯한 국을 먹고 배탈까지 났던 곳인지라
식구들을 끌고 가기에는 좀 그런
대형 쇠고기 정육 식당을 일산 구산동에서 하고 있다.
그 친구하고는 사연이 많다.
30여 년을 쌓아 왔으니 그럴 수밖에.
해외 지점 근무 중 뒤늦게 합류한 1~2살 아래의 직장 동료로 만나서
근무 국가가 바뀌어도 다시 만나고
소속사들이 바뀌어도 만났다.
부친상 모친상은 함께 치렀다.
그 친구 형은 나보다 학번이 하나 위이고
동생들은 당연히 제법 연하들.
K대 법대를 나온 동생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며 좋아하던 날은
내가 그를 위해 술 한잔을 샀고
Y대 국문과를 나온 형이 첫 시집을 냈던 소식을 전하면서는
그가 술을 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의 형은 요절 시인이 되었고,
형수는 청상과부가 되어 두 아이를 키워냈다.
행정고시 출신의 동생은 유명세를 탄 서울시 국장을 거쳐
지금은 서울의 모 구청장.
S대 상대를 나온 막내 동생 역시 삐삐 5인방 회사를 차려 잘 나갔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피해 좀 늦게 찾아가 보니
상찬받는 구청장 동생 외에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신용카드 조회기까지 개발했던 막내 동생은 5년째 병원 생활.
그동안 어찌 전화 답 한 번 없었느냐고 하자
그 친구 왈, “내 꼬라지가 이래서...”
그 친구는 ‘꼬라지’라고 표현해야 어울릴 정도로
어설픈 웃음을 백발 위로 날리고 있었다.
지금 가진 것 톨톨 털면 빚잔치하기 딱 맞다며.
죽기 전에 빚을 남기고 가진 않으니 다행이라며...
고향 동네로 귀촌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날 집으로 7시쯤 돌아왔을까.
내가 현관 앞에서 키 번호를 더듬고 있더란다.
요행히도 그게 울 집 마마님 눈에 띄어 무사 입성.
다음날 8시까지 자고 나서, 그래도 도서관 출근은 했다.
내 평생 술 마시고 문 앞에서 정신을 놓아본 적은 없었다.
누가 날 그렇게 술을 먹였을까.
무엇이 날 그토록 취하게 만들었을까.
주방에서 일하던 물기 묻은 손을 다 닦지 못한 채
두 손으로 내 한 손을 반기던 그 친구 아내의 환한 웃음이
그 친구의 잿빛 백발이
너른 식당이 휑뎅그렁하게 보이던 풍경이...
요절한 그의 형과 오랜 병원살이의 동생 그림이
지금도 자꾸만 겹치고 되감겨 온다. [Apr. 2016]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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