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名詩) 감상과 옥에 티
◎ 의자 밑에서 지하철 공사 굴삭기 소리가 덜덜덜 났다 -황지우, 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다.
[설명] ‘굴삭기’는 일본어 ‘굴삭기[掘削機, くっさくき]’에서 직수입된 일본어 투 용어이므로 ‘굴착기’로 순화되어야 한다고 지적되고 있는 낱말이다. 참고로, ‘굴삭(掘削)’은 ‘땅을 파는 것’이고, ‘굴착(掘鑿)’은 ‘땅이나 암석 따위를 파고 뚫음’의 뜻. 그러나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한 순화어는 둘 다 ‘땅파기’로 되어 있다.
◎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 - 고재종,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
[설명] 시의 제목으로 쓰인 표현인데, ‘다저녁때’는 ‘저녁이 다 된 때’를 뜻하는 한 낱말의 복합명사이다. 고로 ‘다저녁때의’로 붙여 적어야 한다. 참고로 ‘다00때’나 ‘다0때’의 꼴로 된 낱말은 이것 하나뿐이다.
◎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 신경림, 여름날
[설명] ‘철벙대다’와 비슷한 ‘첨벙대다/첨벙거리다’가 있어서 잘못된 표현으로 보기 쉬운데, 맞는 말이며 ‘철버덩대다’의 준말이다. 즉, ‘철벙대다≒철벙거리다(‘철버덩거리다’의 준말. 묵직한 물체가 물에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가 자꾸 나다)이고, 첨벙대다≒첨벙거리다(큰 물체가 물에 부딪치거나 잠기는 소리가 자꾸 나다)이다.
◎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중략]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 오탁번, 白頭山 天池
[설명] ① ‘그리메’가 멋있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그림자’의 옛말(古語)이다. 옛말을 현대에서 쓰면 잘못이다. 이것은 ‘애달프다’를 써야 할 곳에 옛말 ‘애닯다’를 쓰면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으며, 시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은 말인 옛말을 꼭 끌어다 써야만 제대로 시상이 살아난다고 하는 건 지나친 멋부리기용 고집일 때가 더 많다. ② ‘우레 소리’는 ‘우렛소리(≒천둥소리)’의 잘못. 한 낱말이며 사이시옷을 받쳐 적어야 한다. ③ ‘메꿎다’는 ‘고집이 세고 심술궂다’는 뜻이고, ‘아기집’은 자궁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아름다운 말.
◎
철없이 주걱주걱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잘게 부서져서 구슬 같은 소리를 내고/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어무린 색깔로/연등날 紙燈
의 불빛이 흔들리듯 - 송수권, 藤꽃 아래서
[설명] ① ‘주걱주걱’은 사전에 없는 말로, ‘주룩주룩’의 방언이거나 억지 조어인 듯하다. ② ‘어무린’에 쓰인 ‘어무르다’는 ‘헤무르다(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못하고 무르다)’의 잘못. 이 시구에서는 문맥상 ‘어무르다’보다는 ‘버무리다(여러 가지를 한데에 뒤섞다)’가 더 어울릴 듯하다. 억지 조어에 버릇이 들면 고치기가 참 어렵다.
◎ 내 눈물 반대쪽으로/날개도 흔들이 않고 날아가는 것은/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 이문재, 기념식수
[설명] ‘흔들이’는 ‘몸/손발을 늘 흔드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자, ‘진자(振子)(줄 끝에 추를 매달아 좌우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든 물체)’를 뜻하는 말. 즉 명사다. 여기서는 시인이 ‘흔들이’를 ‘흔들다’의 명사형, 곧 ‘흔들기’와 같은 것으로 착각했거나, 부사형 ‘흔들지’ 대신 유화적 표현으로 ‘흔들이’를 조어한 듯싶은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시구에서는 어떤 연유에서건 굳이 ‘흔들이’로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즉, ‘흔들이’를 쓰면 ‘날개도 흔들이(를 하지) 않고’가 되는데, 이것을 ‘날개도 흔들지 않고’로 표현한다 해도 시상의 흐름이나 형상화의 내밀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느닷없이 어색한 ‘흔들이’가 나타남으로써, 자연스런 이미지 전개가 잠시 멈칫거리며 흔들린다고 해야 할 듯하다.
◎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중략]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 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중략]/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 곳에 오라 -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2
[설명] ①‘똥구루마’는 ‘똥+수레(車, 일본어 ‘구루마’)’의 차자(借字) 합성 비속어로서 ‘똥 수레’를 끄는 ‘변소 청소(꾼)’를 뜻하는 비표준어다. 이 작품에서는 하층민으로 푼돈벌이를 하다 온 사람들도 미국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행세를 할 수 있게 되는 풍속도를 비아냥스레 표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비속어를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똥구루마’는 현재 사전에 없는 말이다). ②‘세속도시’라는 낱말은 사전의 표제어에 없는 말이므로, ‘세속 도시’로 띄어 써야 한다. ‘-도시’가 들어간 합성어들은 다음과 같이 전문용어이거나 학술용어들일 때가 많다. <예> 전원도시/(田園都市)/계획도시/공간도시/국제도시/쌍자도시(雙子都市)≒쌍둥이도시/연담도시(聯擔都市)/완전도시 따위. ③‘우겨 넣는구나’는 ‘욱여넣는구나’의 잘못. ‘주위에서 중심으로 함부로 밀어 넣다’는 ‘욱여넣다’인데, 여기서 ‘욱이다’는 ‘욱다’의 사동사로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지게 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겨넣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며, ‘우겨 넣다’도 잘못이다. ‘우기다(억지를 부려 제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다)’이므로 ‘우겨 넣다’로 쓰면 ‘고집 부려 넣다’가 되므로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흔히 실수하곤 하는 표기 중 하나이다. ③‘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 곳에 오라’에서 ‘이 곳’을 띄어 쓴 것은 ‘이’를 관형사로 처리하여 ‘이곳’을 특정하여 가일층 강조하고자 한 의도인 듯하지만, ‘이곳’에는 ‘여기’라는 뜻과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장소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서의 두 가지 기능이 모두 있으므로, ‘이곳’으로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이 곳’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 확인 노력 없이 상식적인 어법에만 의존하여 띄어 적는 바람에 비문법적인 표현을 애써서 만든 셈이 되어 버렸다. {참고} 이 구절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남진우의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중 마지막 연을 패러디한 것이다.
◎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중략]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른다/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지금쯤 내 어린 것은/얼마나 젖이 그리울까/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난만한 그 눈동자, - 나희덕, 어린 것.
[설명] ① ‘다람쥐새끼’라는 낱말은 없다. ‘다람쥐 새끼’로 적어야 다람쥐의 새끼라는 뜻이 된다. ② 시인은 ‘어린것’과 ‘어린 것’이라는 표기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는 이 두 말의 의미 차이에 주목하고 그것을 살리려고 하는 듯하다. ‘어린것’은 ‘어린아이나 어린 자식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을 낮잡는 말’이다. ‘어린것’의 비슷한 말로 사전에 ‘새끼’와 ‘어린이’가 올라와 있을 정도로 ‘어린것’은 사람을 포함한 동물의 새끼를 중립적으로 귀엽게 포용하는 말이다. 그 반면, ‘어린 것’은 동물의 새끼나 어린이에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산삼의 어린 것’, ‘새순의 어린 것을 애순이라고 한다’에서처럼 ‘새끼’라고 할 수 없는 것 등에 쓰인다. 따라서 시인이 ‘어린것’보다도 더 넓게 포용하고자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한 ‘어린 것’이라는 표현은 자칫하면 ‘다람쥐 새끼’를 넘어 식물까지도 포용하게 되어,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은 것이 되어 도리어 시의 품격과 의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시어라 할지라도 그 말들은 일차적으로 사전적 정의를 만족한 뒤에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한다. ③ ‘난만하다(爛漫-)’는 다음의 세 가지 뜻을 가진다. ㉮꽃이 활짝 많이 피어 화려하다. ㉯광채가 강하고 선명하다. ㉰주고받는 의견이 충분히 많다. 그리고, 이 ‘난만하다’의 비슷한 말로는 ‘만발하다/탐스럽다’일 정도로 무엇이 많다는 뜻이 우선이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천진난만하다(말/행동에 아무런 꾸밈이 없이 그대로 나타날 만큼 순진하고 천진하다)’나 ‘천진무구하다’ 쪽으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난만한’이라는 부적절한 표현 대신 그에 합당한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난만하다’는 어떻게 해도 ‘천진난만하다’의 준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설명] ‘누우떼’는 사전에 없는 말로 ‘누우 떼’의 잘못이다. ‘떼’는 ‘목적/행동을 같이하는 무리’를 뜻하는 명사로, 다음과 같이 띄어 적어야 한다. <예> ‘양치기 소년이 양 떼를 몰고 나타났다; 젊은이 한 떼가 몰려왔다.
◎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 배한봉, 공명을 듣다.
[설명] ‘마음놓다’라는 동사는 없으므로 ‘마음(을) 놓다’로 표기하여야 하며, ‘안심하다’의 뜻과 같다.
◎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 김선우, 어미木의 자살1
[설명] ①‘몸삼다’는 없는 말로, ‘몸(을) 삼다’의 잘못이다. ②‘태앗적’에 쓰인 ‘적’은 ‘때’를 뜻하는 의존명사로서, ‘태앗적’은 ‘아이 적’이나 ‘처녀 적’과 마찬가지로 현재 사전에 없는 말로 ‘태아 적’으로 띄어 적어야 한다. 그러나 ‘적’은 다음과 같이 합성어를 만들기도 하므로 일부 낱말 뒤에서는 생산력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사전의 표제어가 아니므로 한 낱말로 보기 어렵다. <예> 태곳적(太古-); 고릿적(옛날의 때); 배냇적(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소싯적(少時-); 요마적(지나간 얼마 동안의 아주 가까운 때); 이마적(지나간 얼마 동안의 가까운 때).
◎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 이덕규, 어처구니
[설명] ‘앵겨붙다’는 사전에 없는 말로 ‘안겨 붙다’의 잘못이다. ‘안기다’는 ‘안다’(두 팔을 벌려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그렇게 하여 품 안에 있게 하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를 겸하는 말. ‘붙다(사람이 서로 바짝 가까이하다)’는 ‘안기다’와 동격의 본동사로서 보조용언으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겨 붙다’는 항상 띄어 적어야 한다.
◎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문득 팔짱끼어서/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고은, 文義마을에 가서
[설명] ‘팔짱끼어서’는 ‘팔짱(을) 끼어서(袖手)’의 잘못으로, ‘팔짱끼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관용구 ‘팔짱(을) 끼고 보다(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아니하고 보고만 있다)’에서 보듯, ‘팔짱(을) 끼다’로 띄어 적어야 한다.
◎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새로 돋은 정맥이/바르르 떤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설명] ‘섰는’은 ‘서 있는’에 비하여 어색한 구성이어서 문제적 표현이기는 하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즉, ‘섰는’은 ‘섰+는’ ->‘서’(어간)+‘었’(과거 관련 어미) +‘는’(관형어 구실을 하는 현재 관련 어미)으로 분석되는 바, 이를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섰’에 들어 있는 ‘었’은 어미로서 ‘서다’와 같이 끝음절의 모음이 ‘ㅏ/ㅗ’가 아닌 용언의 어간이나 다른 어미 앞에 붙어서,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사건/행위가 이미 일어났거나 완료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거나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나타낸다. 예컨대 ‘철수가 밥을 먹었는지’에서처럼 어미 ‘-는지’ 앞에 붙어 철수가 밥을 먹는 행위를 완료했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②‘섰는’에서의 ‘는’은 앞말이 관형어 구실을 하게 하고 사건/행위가 현재 일어남을 나타내는 어미이다.
◎ 門이 열리어져 있는 敎會堂의 形式은 푸른 뜰과 넓이를 가졌다. -김종삼, 아우슈뷔츠
[설명] ‘열다’의 피동형은 ‘열리다’와 ‘열어지다’인데, ‘열리어지다’는 이 두 가지 피동형이 중복된 형태, 곧 불필요한 이중 피동이다. 따라서 ‘열리어져 있는’은 ‘열려 있는’이나 ‘열어져 있는’ 중의 하나로만 표현해도 충분하다.
◎ 보리 바심 끝마당/허드렛군이 모여/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지는 해가 이중으로 풀리고 있었다./허드레,/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징소리/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 박용래, 點描
[설명] 이 시를 상찬하는 어떤 이는 이 시의 해설에 파이퍼의 주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즉, 시가 힘을 가지게 되는 근원은 추상적인 상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에 있으며 그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은 묘사에 의하여 획득된다고 하면서, 이 시의 특장은 객관 묘사와 주관 묘사의 절묘한 궁합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시의 객관적 풍경으로, 보리 타작을 마친 농사꾼들이 모여 타작 뒤의 검불을 모아 불을 지피고 있는데 때마침 뻐꾸기 소리와 징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걸 ‘푸슷푸슷 튀는 연기’와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라는 절묘한 주관적 묘사로 이끄는 덕분에 ‘지는 해’는 도리깨 꼭지까지 아우르면서 또 하나 올올이 풀리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사물과 사물 현상에 대한 시인 특유의 섬세하고도 민감한 관찰과 감성이 아니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미적 표현의 소중한 성과라면서, 이 시의 또 다른 묘미로 아름다운 우리말의 능숙한 구사를 꼽고 있다. 특히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라는 시행을 두고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말과 말의 충돌을 통해 전혀 새로운 정서적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 보기엔 아니다. 완전히 그 반대다. 시인이라고 해서 우리말을 이렇게 비틀고 마음대로 주물러도 좋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부터 밝히고 싶다.
객관적 상황부터 훑어보자. 추수가 끝난 농부들은 검불이나 북데기를 모아 불을 피운다. 검불로 피우면 ‘모닥불(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 놓고 피우는 불)’인데, 이럴 때는 북한어 ‘북덕불(북데기에 피운 불)’이 제 격이다. 그 불로 뭘 구워 먹거나 하자는 건 아니니 그건 ‘군불(필요 없이 때는 불)’ 아니면 ‘헛불(쓸모없이 피우는 불)’이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듯 ‘허드렛불’은 아니다. 그런 불은 우리말에 아예 있지도 않다.
‘허드레’가 뭔가. ‘그다지 중요하지 아니하고 허름하여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 물은 ‘허드렛물(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일에 쓰는 물)’이 되고 그런 말은 ‘허드렛소리(별로 쓸모가 없고 중요하지 아니한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처럼 중요하지 아니한 불을 뜻하는 말로 ‘허드렛불’이라는 말은 우리말에 없다. 의미로만 좁혀 꼽자면 군불이나 헛불이 훨씬 더 가깝다.
그런 ‘허드레’인데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라는 표현을 대하면 그야말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뻐꾸기가 허드레 허드레 소리를 내며 운다는 것인지, 혹은 뻐꾸기가 허드렛일 삼아서 운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허드레꾼’이라고 하지 시인이 창조한 ‘허드렛군’은 아예 없는 말이다. 어떤 일을 습관적으로 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낮잡을 때는 우리말에서 ‘-꾼’이라는 접사를 쓰기로 정해놓고 그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우리말의 틀을 무시하고 임의로 주무르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기가 ‘푸슷푸슷’ 튄다고 했는데, 풍부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자랑하는 우리말이지만 ‘푸슷푸슷’이라는 말은 사전에 없다. 검불을 태울 때 튀면서 나는 소리라면 예전에 고어로 쓰이던 ‘퓌다’와 관련지어 ‘퓌식퓌식’ 정도를 조립할 수 있으려나 (그것도 억지로지만). ‘푸시시(불기가 있는 물건이 물 따위에 닿을 때에 나는 소리)’도 물기의 도움을 받아야 나는 소리이니, 이 상황에서는 적절한 말이 되지 않는다. 안타깝다. 그렇다고 사전에도 없는 ‘푸슷푸슷’를 자신 있게 휘두를 수는 없다. 신조어 버릇을 남용해서는 안 되므로.
시인의 우리말 쉽게 까부르기는 ‘도리깨 꼭지’에서 가장 높에 빛난다. ‘도리깨 꼭지’로 띄어 적는 바람에 도리깨 자루 중 구멍이 있는 끝쪽을 뜻하게 되어, 엉뚱한 말이 되었다. ‘도리깨꼭지’로 붙여 적어야 한다. 그래야만 ‘도리깨 자루 끝의 구멍에 끼워 도리깻열을 매는 데 쓰는 나무로 된 비녀못’ 곧, 도리깻열을 위아래로 돌릴 때 축의 구실을 하는 그것을 제대로 뜻하게 된다.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려면 바로 이 비녀못 부분이 축바퀴처럼 돌면서 도리깻열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중략]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중략]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 -나태주, 대숲 아래서
[설명] ① ‘굵은 빗방울 따위가 성기게 떨어지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나뭇가지/ 검불 따위가 불똥을 튀기며 기세 좋게 타들어 가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의 뜻으로 흔히 쓰는 ‘후둑이다/후둑[후두둑]대다/후둑[후두둑]거리다’는 우리 사전에 없는 말로 모두 북한어. 우리말로는 ‘후드득대다/후드득거리다’가 올바른 말이고, ‘-이다’ 꼴도 ‘후드득이다’(x)는 잘못이고 ‘후드득하다’(o)이다. ② '그리고도'는 없는 말. '그리고'나 '그러고도(동사 ‘그러다’의 활용형)'의 둘 중 하나로 써야 한다. 아마도 시인은 '그리고'로 쓰자니 운치가 떨어지는 듯하고, '그리고도'로 써도 '그러고도'의 뜻을 나타내려니 싶어서 어림짐작으로 이 말을 쓴 듯하다. '그리고도'는 대표적인 비문법적 표현 사례의 하나에 드는 말이다. ③ ‘사운대다’는 ‘사분대다’의 잘못으로 ‘사분대다≒사분거리다’인데, ‘살짝살짝 우스운 소리를 해 가면서 자꾸 성가시게 굴다/가만가만 가볍게 행동하거나 지껄이다’를 뜻한다. ④ ‘눈물자죽/눈물자욱/눈물자국’은 사전에 없는 말로 모두 ‘눈물 자국’의 잘못이다. 특히 ‘눈물자욱/눈물자국’은 우리말에서 인정하지 않는 북한어로, ‘피눈물을 뿌리며 힘겹게 걸어온 생활의 자국’의 비유어다. ⑤ ‘해지는 서녘구름’은 ‘해 지는 서녘 구름’의 잘못이다. 즉, ‘해지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해(가) 지다’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해어지다(닳아서 떨어지다)’의 준말이다. ‘서녘구름’ 역시 없는 말이므로 ‘서녘 구름’으로 적어야 한다. (‘서녘구름’을 인정하면 ‘동녘구름’과 ‘북녘구름’처럼 동서남북 내지는 사방팔방의 모든 구름도 아울러 인정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좀더 튼튼하고/좀더 당당하게/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중략] 제 눈속의 불/천년의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중략] 천년 후의 여자 하나/오래 잠 못 들게 하는/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문정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 투옥당한 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男根을 잘리우는 치욕적인 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설명] ① ‘좀더’는 ‘좀 더’로 띄어 적어야 하는 두 낱말, 즉 두 개의 부사다. ‘더욱더/더더욱’ 등은 독립부사로 한 낱말. ② 여기서 ‘천년’은 실제의 1000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을 뜻하는 말이다. ‘천년만년(千年萬年)/천만년/천만세’ 등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뜻일 때는 모두 한 낱말로 붙여 적어야 하는 복합어다. ③ ‘당겨놓은’은 ‘당겨 놓은’으로 띄어 적어야 한다. ‘당겨놓다’라는 동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당기다’와 ‘놓다’는 동격의 본용언들이기 때문에 보조용언 붙여 쓰기 허용 조건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④ ‘잠 못들다’라는 말이 없으므로 ‘잠 못 들다[이루다]’로 적어야 하는 말이니, 옳은 표기이다. 주의해야 할 표기이기도 하다. 문 작가는 우리말 어법에 항상 신경을 많이 쓰는 멋진 분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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